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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성경적 해석

제 목: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성경적 해석 

                              

                                김범수 목사(워싱턴동산교회,MD) 


Ι. 서론: 성경해석의 안목 


 성경의 모든 해석은 부분적인 해석이 아닌 전체를 한눈에 보아야 한다.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거나, 영과 육을 분리하는 영지주의적인 사고나,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시대별로 나누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매함을 보여주는 유치한 것이다. 고로 구약과 신약을 역사적으로 보는 통시적(Diachronic)인 눈과 그 시대의 상황을 단면으로 동시적(Synchronic)인 눈을 가져야 한다. 이 안목을 우리는 통전적(INTEGRITY)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해석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안식일 계명의 구약 율법과 새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볼 수 있는 신앙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안식일 계명을 포함하는 구약의 율법을 액자의 틀이라고 한다면 액자에 들어가는 사진이 바로 주일로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안식일과 주일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축복이다. 두 개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성과 계시의 발전성으로 볼 때 주일은 안식일보다는 더 구속적이고, 완성적이다. 안식일이 더 성경적이냐? 주일이 더 성경적이냐? 하는 흑백논리를 떠나서 보다 더 역사적이고, 언약 성취적이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볼 때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엇이 더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구약에서의 안식일 


  1. 하나님의 창조에서 본 안식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샤바트 שׁבת)하셨다. 안식하면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했고, 거룩하게 했다(창2:3). 하나님은 안식은  첫째,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만족, 둘째,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함, 셋째, 그 날을 복되게 함이다. Genesis,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C.F. KEIL & F. DELITZSCH,Hendrickson Publishers, Inc. 

그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복이다(창    1:28). 이 복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영생의 복이다. 이 복은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쉬게 하는 안식의 복이었다. 이 복은 요한복음1:16절에서 요한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고 한 충만의 복이었다. 이 충만은 영원한 안식을 누림으로 인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모세의 율법에서의 안식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안식일의 계명을 율법가운데 주셨다. 그 안식일 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 하게 하는 선포적 명령이었다(출20:8-11;겔20:11-17). 거기에는 선택과 조건이 아니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명령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리는 언약이었다. 이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출31:13-17)이었고, 하나님의 안식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 7일에 육체적 쉼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누리는 영원한 안식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출16:4)하셨고, 그것은 그들을 향한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의 축복이었다. 그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하게 될 때에 오게 되는 풍요의 축복이었고, 이 축복은 야    고보서1:2절에 온전케 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그래서 그 안식일은 구별된 거룩한    날이어야 하는 것은 그 날은 오직 여호와를 위한 날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만이 그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신5:15). 


  3. 새 언약과 안식일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더럽혔고, 이사야의 예언처럼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간 백성들이 되었던 것이다(사1:4).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금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다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처음부터 약속한 첫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새언약을 맺었다(사56:1-7). 그 새언약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고, 모든 민족이 주 앞에 와서 제사를 드리며, 예루살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그들의 마음에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렘31:31-34;겔36:26-36). 이 새언약은 장차 오실 한 아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성취될 것이라고 했다(사9:6). 그 메시야가 온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백성들에게 평화와 화평을 준다고 했다(사53장). 이 새언약은 율법의 불순종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평화와 안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하신 것은 바로 안식일의 계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III. 신약에서의 안식일과 주일 


    1.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 


예수님은 안식일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셨다(눅4:16). 그러나 예수님은 새언약의 성취자로 오셨기에 선지자와 율법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나나 폐하러(καταλῦσαι)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πληρῶσαι) 하려 함이로다(마5:17)고 했다. ‘폐하러’는 1) 버린다. 2) 아주 흔적을 없앤다. 3) 파괴시킨다. 4) 죽인다. 5) 약화시킨다. 6) 무시한다 의 뜻이 있다. 여기서 ‘폐하러’는 있는 흔적을 없애 버려서 무효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에서는 낡아지고, 쇠하여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했다(히8:13). .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치워버리려고 오시지 않고, 새롭게 완성시키려고 오셨다.  요한계시록21:1절의 ‘새 하늘과 새 땅’처럼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케’는 ‘폐하러’와는 정 반대의 말이다. 너무나 놀랍고, 아름답고, 멋있게, 그리고 훌륭하게, 바로 “하나님이 그 만드신 모든 만물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히브리어)”(창1:31)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를 말한다. Donald A. Hager 이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예언의 중심이라고 한 것처럼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33.A. Matthew 1-13, Word Book Publisher, Texas) 

  예수님은 첫언약이 이루지 못한 것을 새언약의 주체가 되어 다시 첫창조에서 누렸던 완전함, 풍요, 안식, 영생, 기쁨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간 그 완전한 상태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안식일을 준수하셨지만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이다(마12:1-14). 안식일의 주인 되심은 안식일 계명이 마음으로 이루지 못하고 행위에만 머무름으로 인해 생긴 저주와 심판을 끊어내고 예수님을 통해서 의와 인과 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창조자요, 구원자이시다. 그 분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의식, 계명, 율법도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언약을 이루시는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그러니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뜻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거룩을 저버린 의식적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2. 바울이 본 안식일과 주일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고 다만 그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했다(롬3:20).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되셔서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했다(롬3:21). 이제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반복적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안식일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죄가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간과(보지 않고 넘어간다)하심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제사와 또 어떤 날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해야 하며(롬14:5-6), 다시 계속 안식일 계명을 지킴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그 율법의 의문에 종이 되어 그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행위가 헛수고라고 이라고 했다(갈4:9-10).  율법은 예수님 오시기까지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고, 그리스도를 배우게 하는 몽학선생이 되었지만 그 율법은 우리를 죄 가운데 가두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율법대로만 살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지만 사람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이다(갈3:18-26).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울 수 없었던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함으로 인해서 새언약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3. 히브리서에서의 안식의 의미(히4:1-10) 

    히브리서에서는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 곧 유대인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나 그 안식에 들어갈 곳을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다고 했다.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믿어야 하기에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 믿어야 한다고 했다(히4:1-6). 그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후 쉬심과 같이 쉬게 되는데 그 쉼은 육체적, 영적, 현세적, 그리고 영원한 안식이라고 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기에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했다(히10:1). 예수님은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며,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다(히10:19).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날마다 그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히1:16). 안식일의 계명이 아니라 은혜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히9:15). 

  


  IV, 초대교회에서의 안식일과 주일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후 안식일의 준수에서 주일성수(주일예배)로 바뀌어갔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안식일을 지켰다는 말씀들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눅23:54-24:2;마24:20;행13:44;26:13;17:2;18:4;21:27).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경은 구약의 안식일의 계명을 준수하라는 직접 명령처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초대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들은 안식일에서 주일로 그 예배가 바뀌어 가고 있음을 성경은 증거한다.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안식 후 첫날’이라고 했고(눅23:55-56), 요한은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요20:19)이라고 했다. 요한은 ‘이 날 곧 ’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미 요한은 부활하신 날이 다른 어떤 날보다도 더 중요한 ‘ 이 날’이라는 인식을 한 것이다. 바로 ‘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이었다. 그 날이 주일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 날은 안식일 다음 첫 날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안식 후 첫날‘(행20:7)을 처음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계속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제 사도바울의 마지막 3 차 전도여행지였던 에베소에서의 모임을 ’‘안식 후 첫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날을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했다. 이 떡은 무슨 떡인가? 교회에서 친교하는 식사의 교제가 아니다. 이 떡은 성만찬의 떡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안식일에는 있을 수 없는 성만찬의 떡이 안식 후 첫 날에 모여서 나눈 것이다. 그 때까지 ’그 날‘이 무슨 날이라고 정확하게는 부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초대교회는 주일에 떡을 떼려 모였던 것이다. 그 뿐 만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날 밤중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다. 히4:11에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다음 12    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이 말은 무엇인가? 초대교회는 모여서 떡을 떼었고, 안식에 들어 가기위해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일예배의 틀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뿐 만 아니라 고린도전서16;1절에 보면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라고 말씀한다. 이미 초대교회는 점진적으로 주일예배의 기초를 세워 나갔다. ‘매 주일 첫날”은 ’안식 후 첫날‘의 의미가 아니다. 원문을 보면 

  “ κατα ̀μίαν σαββάτων ἕκαστος”이다“.  κατα 는 (따라, 마다, 동안에)의 뜻이고,  ̀μίαν(어느 하나),  σα    ββάτων ἕκαστος(매 안식의)이다. 이 ‘매 안식일’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매 안식일인가? 아니면 매 안식후 첫날이라느 말인가? 

이 말은 “매 안식 후 첫날”이 아니라 매번 안식하며 모이는 주일날에“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안식이라는 말이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이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그들은 안식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 말은 ”매 안식일로 지키는 그 주일날에“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안식 후 첫날의 예배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안식은 주일의 예배로 인정된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매 안식일”이란 말은 없다.  ἕκαστος란 말은 초대교인들이 매주일 모이는 예배의 날을 지정한 말이다. 구약의 안식일 준수는 그렇게 매 안식일이란 말을 구태여 쓰지 않아도 안식일은 안식일이었다. 그러나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안식 후 첫날‘ 모이는 그 매주 안식 후 첫날’의 모임에 대해서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은 그들에게는 축제요, 기념적인 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에 모여 서로 나누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4-15) 

    그 다음에 가장 관심이 되는 요한계시록에서의 ‘주의 날’(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이다. 이 날이 안식일인가? 아니면 ‘주일’인가? 아니면 그냥 날 가운데 주님을 위한 날인가? 무슨 날이 주의 날인가? 사도요한은 ‘주의 날’을 선지서에서 예언한 “날”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 날”(요엘1:15;3:1,18;미5:10;슥13:4;습3:16)),여호와의 날(요엘1:15;암5:20;슥14:1), 여호와의 큰 날(습1:14)같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임함, 곧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과 심판의 날이 바로 그 날이다. 그 날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날이요, 백성들의 입에서 찬송하는 날이요, 그 날에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이 날은 안식의 날이다. 이 안식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심판하는 모든 권세와 구원의 권세를 맡기셨기에 아들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영생의 안식을(요5:24),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한이 ‘주의 날’이라고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날이며, 그 날은 예수님이 주인 되신 날이며, 그 날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의 본을 보여 주신 ‘주의 날 곧 주일’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15:20-26).  David. E. Aune은 그의 주석에서 이 날이 부활된 주일이라고 했다.  David. E. Aune. Revelation,Word Biblical Commentary. Vol.52. Word Books. 1997. 


  

  V. 초대교부들의 증거  Roberts,A. Donaldson, J. & Cox, A,C,1997, The Ante-Nicene Fathers Vol.1: Translations of Writings of the Fathers Down to 325. 



  사도요한의 제자이자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오스는 "이상한 교리나 낡은 우화에 속지 말라.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아직 유대 율법에 따라 살고 있다면 우리들은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질서 속에서 자라났지만 안식일을 더이상 지키지 않는 새로운 소망을 소유한 사람들"로 분류하고 있다“. 안식후 첫 날을 교회가 모이는 "주의 날"로 삼는 성경적 근거를 부활의 날(마가복음 16:2), 그래서 이날은 "기쁨의 날"(The day of joy)이라 했다.  (The Ante -Nicene Fathers, Vol.  I , pp. 62-63) 


      2세기 중엽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자 순교자 저스틴은 "트리포와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    )에서 기독교 신자들은 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왜 할례를 지키지 않으며,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새 언약에 의한 진정한 안식일 준수는 죄를 멀리하는 영구적인 안식을 지키는 것이다. 아담, 아벨,에녹,노아 등과 같은 옛날의 의로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강요한 것은 그들이 의롭지 못하고 마음이 완악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터툴리안은 "우리는 안식일이나 다른 유대 절기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교도들의 축제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의 저서에서 할례를 계속 주장하는 사람은 아담,아벨,노아,에녹, 멜기세덱 및 롯    도 역시 이러한 것을 지키고 행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안식일이란 죄로부터 의 휴식을 상징하며, 인간이 하나님에게 최종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계속 말하고 있다. 안식일은 율법의 다른 의식적인 규정과 더불어 새로운 입법자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하도록 의도 되었을 뿐이다. 


  VI.. 안식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 해석이라고 보는 사람들 


    안식일은 구약에서 분명히 명령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일은 신약에 없는 말씀이기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고,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놓게 하는 반성경적 태도라고 보고 있다. 

      주일을 명령한 것은 교황과 교회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8번씩이나 나오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처럼 일요일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 악의 세력에 무릎을 꿇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안식일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눅`23:54-24;2; 마24:20).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기에 안식일은 지켜야 한다고 한다. 안식일 준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일성수하는 것이 성경의 해석상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교회 전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큰 위험이 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인을 맞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그들이야말로 참 하늘의 유업을 받을 참 이스라엘 자손 144,000명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다(마16:18).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이다. 만일 계속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또 예수님께서 왜 교회를 세웠는가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VII. 결론 


 1.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예표 

  구약 율법인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과의 구별된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생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셔서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셨다. 그 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의 축복을 갖게 한 것이다. 이 영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안식이다. 


2. 교회는 새언약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며, 주일예배는 언약 백성들의 천국잔치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에 매여 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였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죄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워 그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한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이제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증거하고, 예배해야 한다. 요한계시록7장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는 찬송처럼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주일예배가 바로 이런 천국잔치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주일예배를 통해서 구약의 안식일 계명에서 이루지 못한 순종과 믿음,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3.성령의 조명이 깨닫게 하는 진리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게 한다고 말씀한다(고전2:10). 칼뱅은 “우리의 생각은 너무 오만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것이 계시되고, 성령의 조명을 받는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성경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그러기에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 한    다. 우리가 아는 것도, 깨닫는 것도 다만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    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에베소서    1: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