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의 비전들의 강점?

삶과 인격, 신앙의 일치를 추구하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인 친구들의 공동체, 자유 교회, 고백 교회의 전통이 가장 큰 강점입니다.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거저 내주는 선물의 경제(oikonomia doni)라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운동, 공동체적 형상에 맞닿아 있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적인 지지는 타협 없이 세상에서 세상 정사와 권세의 불의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의 정의로운 평화의 제자도를 가능케 합니다. 이는 바보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서 걸어가셨던 바로 그 평화의 길입니다.


아나뱁티스트의 장점과 단점?

아나뱁티스트의 가장 큰 장점은 세상 가운데 언덕 위에 등경처럼 평화의 복음을 세상 가운데 국가권력이나 맘몬의 영역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제자도에 기초한 공동체적 실천입니다. 명실상부한 복음의 복음적 실천, 목숨까지 버리는 평화의 평화적 실천이야말로 아나뱁티스트의 핵심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힘에 의지하여 공격적이고 무례하며 전투적인 방식으로 선교하지 않습니다. 힘에 호소하지 않는 약함의 방식으로 약한 자를 배려하고 자신의 공동체에서 먼저 평화와 화해, 일치를 추구하는 방식, 곧 교회가 평화의 공동체를 먼저 이루고 회복하는 방식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적 선교(missio communia)라고 부릅니다.

단점이라면 기존 개혁주의와 같이 이원론적인 분리주의에 사로잡힐 위험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개혁주의처럼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 교회는 모두 다 동일한 주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실천되어야 할 영역으로 사고합니다. 실천의 방식도 또한 힘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평화의 약함의 방식을 추구합니다. 일부 아나뱁티스들 그룹에서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유감스럽습니다. 또한 평화주의를 무저항의 보수적 보신주의와 혼동하여 정의로운 평화적 실천에 소극적인 점이 아쉬운 점입니다.


한국 기독교에 아나뱁티스트 신학의 역할?

한국 기독교는 개화기와 해방 공간을 거치면서 선교국인 미국과 식민지 지배국인 일제가 다른 제국적 격리가 일제의 식민지의 점령군으로 미군정이 진주하면서 발생한 선교국과 지배국이 동일한 제국적 일치를 거치면서 유사 봉건적 혈통주의에 사로잡힌 왜곡된 이원론적 국가주의라는 제국적 폭력에 포섭되었습니다. 일제는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친일주의자들이 일제라는 제국적 폭력에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심대한 영적인 잘못을 저지렀습니다.

하나님보다 국가가 우선되었고, 해방 공간에서 교회의 친일주의자들이 이승만과 결탁하여 친미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연장하는 발판 삼음으로써 교회는 깊숙이 국가라는 조직화한 폭력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6.25를 거치면서 일부의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반공주의라는 이념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면에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한반도 지배 체계가 있습니다.

복음은 하늘에는 영광이요, 이 땅에는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평화의 충성을 맹세해야 할 교회가 국가에 충성하며 분단의 현실이라는 명목하에 평화를 말하는 것조차 사실상 금지했습니다. 저는 한반도의 중요 모순은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민중·민족·해방이라는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한반도에서 '정의로운 평화'의 가치는 이 모든 모순을 풀어 가는 근본 가치입니다. 동북아시아에 형성된 갈등과 폭력의 제국적 구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평화'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구한말 개화기와 해방 공간을 통해 한반도 남북에 형성되고 강화된 유사 봉건제적 혈통주의에 기초한 우상 숭배적인 국가주의를 '정의로운 평화의 복음'을 통해 극복해 가야 할 시대적인 요청 앞에 서 있습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경건이나 교회만의 부흥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평화의 복음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주의에 타협한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뿌리까지 돌아보는 차원의 깊이 있는 전 교회적인 회개와 상처의 치유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중국과 미국, 중화 자본과 유대 자본의 헤게모니 쟁탈전을 앞에 두고 가장 쉽게 전쟁터로 변할 한반도에서 제주 강정 해군기지처럼 충돌의 빌미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 일제에 신사참배하며 배교했던 한국교회가 참회도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우상을 우상숭배하고 번영을 의지하는 맘몬주의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세계사적인 변화의 시기에 한국과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과 교훈이라는 백척간두에 서 있습니다.


최근에 급하게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의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여론과 관심?

비록 한때의 관심이지만 선한 열매로 이어지기를 바라봅니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을 많이 느낍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제대로 하나 된 모습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공동체적인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하나의 지적인, 실천적인 유행처럼 지나간다면 더욱 어려운 국면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듭니다.


한국 아나뱁티스트의 현주소?

평화주의는 무저항이나 보수적 가치를 지키는 보신주의가 아닙니다. 평화의 복음은 정의를 향한 급진적인 비폭력 저항의 평화적 실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로우셨고 동시에 정의로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래서 비폭력 저항의 급진적인 '정의로운 평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국가나 정부의 사법적 제도에 접근하는 회복적 정의도 중요하고 중재자적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반도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양심적 집총 거부나 대체 복무제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우상숭배적 폭력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국가나 국가주의에 대한 제자도에 기초한 급진적인 비폭력 저항을 우선시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뮌처의 폭력적 봉기는 아나뱁티스트의 평화주의 전통에 반하지만, 정의를 향한 그의 헌신과 열정은 한국 아나뱁티스트가 우선순위를 두고 회복시키고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자산입니다.

교회가 교회 됨을 회복하는 자리에 세상보다 더 세상적이라고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한국교회의 살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하는 평화의 공동체가 오랜 세월 여러 모순의 중첩 가운데 남북의 군사적 갈등과 자본의 폭력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던 '이 땅의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것입니다.

박삼종 / 평화의마을 에스겔 파라클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