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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OOKS BREAD/BIBLE

성경통독 365_에스라서 읽기

365 성경통독 에스라서 읽기


에스라서의 중심주제는 예루실렘과 유대인의 번영을 가져다 주는 세 개의 칙령과 관련된다. 

고레스의 칙령 (1:1), 다리우스의 칙령 (6:8), 아닥사스다의 칙령 (7: 11)이 그것이다. 이 칙령의 내용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실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한 것이다(6:14). 

에스라서의 기록목적은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을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보여주고 

나라를 재건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01, 02, 03장


01장 | 고레스가 포로 귀환을 돕다


에스라서 서론의 몇 구절은 분명 역대하의 마지막 몇 구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역대기와 에스라서가 연속된 이야기로 함께 읽어야 할 책임을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성경은 포로 기간 동안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거의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겪었을 여러 시련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들의 간절한 향수를 적어도 웬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도권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있다(‘감동시키시매’1, 5절). 고레스의 미신도, 예레미야의 예언도, 유대인들의 열렬한 소원도 이 조서가 내려지게 된 궁극적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악간의 주재가 되시는 것이다(사 44:24-28; 45:7).

에스라서는 고레스의 조서 공포와 함께 시작한다.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였던 고레스는 주전 539년, 바벨론 사람들을 물리치고 포로들을 석방한다 주전 538년에 반포된 이 조서는 바벨론 사람들에게서 좀처럼 찾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참조]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고레스는 여호와의 기름부은 종이 되었으니(사 45: 1 이하) 여호와께서는 두 번째 출애굽올 일으키시는데 있어서” 그를 사용하셨다. 여호와께서는 구원역사를 계속적으로 진행해 나가시는 일에 있어서 고레스의 자비로운 통치 방식(피 지배민들이 바사의 지도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발전하도록 권장하는 것)올 이용하셨던 것이다. [반더발 성경연구 1, 코넬리우스 반더발, 520]



02장 | 귀환한 포로의 명단 


고레스의 조서가 반포되자,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잡혀 온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이들은 탈취 당하였던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도 함께 가져 갈 준비 를 한다(1:5-11) .

2:1-70은 이 첫 귀환 때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포로들의 이름을 길게 열거하고 있다. 현대의 독자들에겐 이 긴 명단이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포로 귀환 이후의 하나님 백성들에겐 이 명단이 생명처럼 소중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명단 덕분에 귀환 이후의 하나님 백성들은 자신들의 가계를 포로 시대까지 추적해 올라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이전세대의 하나님 백성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명단이 강조해 주었기 때문이다.



03장 | 제단과 성전을 재건하다


주전 537년 9월-10월쯤, 귀환한 포로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정착한 뒤 이전의 예배 방식을 새롭게 바꾸기 시작하였다. 주의할 것은 모든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유다의 다른 고을들에도 귀환 포로들이 정착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초막절을 지킬 목적으로 제단을 만든 뒤, 그 제단과 함께 초막절을 지킨다. 이렇게 절기를 지킬 경우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런 위험을 감내하였다. 

당시는 예루살렘에 아직 성전이 없었다. 그러나 귀환한 포로들은 여호와께 바칠 제단을 만듦으로써 포로기 이전의 예배를 회복하는 첫 걸음을 땔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만간 성전을 재건해야 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처참히 파괴당한 옛 솔로몬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폐허가 새 성전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 무렵, 예루살렘에서는 스룹바벨이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떠올랐다. 주전 536년 봄, 사람들은 그의 지도 아래 성전 재건을 준비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새 성전의 지대가 놓여진다. 하지만, 솔로몬이 지었던 장엄한 성전을기억하는 노년의 백성들은 비통해 하였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이스라엘에게 닥쳤던 모든 불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곧 성전이 다시금 재건된 감회와 함께 과거 솔로몬의 성전의 휘황찬란한 아름다옴에 비해 포로 시대에 그들이 지은 성전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04, 05, 06장


04장 | 성전 재건얘 반대하는 움직임


본문은 여기서 몇 년의 기간에 걸쳐 일어난 문제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 기간은 세 명의 바사(페르시아) 왕(고레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본문은 첫째로 해묵은 문제를 언급한다. 바사인들은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묶어두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북쪽 이스라엘의 일부 인구를 앗수르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앗수르 제국 각지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사마리아 지역(북쪽 이스라엘)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 종교의 풍습을 가져온 뒤,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와 혼합하였다. 그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와 이방 종교의 요소를 뒤섞어 놓은 형태의 종교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제 일부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재건을 돕겠다고 제의한다. 하지만 스룹바벨은 이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마리아인들의 타락한 종교가 어떤 형태로든 재건된 성전과 연관올 맺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마음이 상한 나머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전 재건을 방

해한다. 그들은 바사인들에게 유다 사람들을 허위 고발한다.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그 성읍을 요새로 만들게 되면 바사인들에게 도전하게 될 것 이라고 고자질한 것이다(4:12-16). 

이 방법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성전 재건 공사는 15년 넘게 중단된다. 성전 공사는 새 바사왕(다리오)이 즉위하는 주전 520년이 되어서야 다시 시작된다.



05-06장 | 성전재건이 다시 이루어지다


*5:1-6:12 닷드내가 다리오왕에 펀지를 보내다

다리오가 조서를 반포하다 성전 재건을 계속 하라는 결정은 우리가 장차 자세히 살펴보게 될 선지자 학개의 사역과 연계되어 있다. 에스라(이 책의 학개서 부분을 보라). 바사 총독(닷드내)은 이 재건 공사에 반대하면서 유다 사람들이 무슨 권한으로 재건 공사를 속개 하였는지 묻는다. 닷드내는 고레스가 이전에 분명히 그 공사를 허락하였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닷드내는 그 답변 내용이 사실인지 왕에게 물었다가 실제로 고레스가 그런 결정을 내렸었다는 답변을 (다리오 왕으로부터) 듣게 된다. 다리오는 이 성전 재건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을 총독에게 내린다.


[참조]

학개서를 보면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의 상태의 일면을 배울 수 있다.

학개는 스가랴(1절)와 함께 성전 재건 공사를 독려하였다. 학개서에 따르면 (1:2), 유대인틀이 처음에 가지고 왔던 성전 재건에 대한 열정이 차츰 식었으며 처음에 재산을 후하게 내놓던 태도가 차츰 자재들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쓰는 태도로 변했으며(1 :4), 흉작에 인플레이션이 따랐으며 (1: 6) , 도덕 수준이 저하되었다. 

선지자 학개는 그 백성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자산들을 소홀히 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이런 일틀이 생기게 하신 것이 라고 말한다(1:9-11; 스 4:24). 그러나 성전이 완공되는 날에는 번영이 뒤따를 것이며(학 2:6-9), 이전에 파괴된 성전으로 인해 애곡하던 사람틀은 더 이상 슬퍼활 이유가 없게 될 것이었다. 

그날에는 스룹바벨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다스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지도자가 될 것이었다(학 1: 14. 이것은 메시야의 도래를 생각케 하는 말씀이다) . 하나님께서 백성틀을 감동시키샤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는 데에서 당신이 친히 나서서 먼저 일하시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학 1: 14).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에는 흔히 노동이 즐거움이 되었다(고전 15:58; 고전3:23-24). [성경본문의 맥을 밝혀주는 에스라&느헤미야, 피터 사우스웰, 50]


*6:13-18 성전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다

성전 재건 공사는 왕의 후원 덕분에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주전 516년 3월 12 일, 마침내 성전이 완공되어 여호와께 봉헌된다. 백성들이 새 성전에서 처음으로 지킨 큰 절기는 유월절이었다(6:19-22).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속박에서 구원하신 일과 밀접하게 연관된 절기이자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절기였다. 이때 지킨 유월절은 포로들이 바벨론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되새기는 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07, 08, 09, 10장 | 에스라의 개혁 프로그램


*7:1-8:14 에스라와 포로들이 돌아오다 

포로귀환으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뒤 유대교는 종교적 갱신이라는 새 장을 맞게 된다.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이 그 계기가 되었다. 에스라서는 이 새 국면이 언제 전개되기 시작 하였는지 정확한 연대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라는 주전 458년 4월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같은 해 8월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에스라는 분명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다 사람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신실하도록 지도하는 일에는 제격이었다(7 :1-10). 

더욱이 에스라는 바사제국으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점은 아닥사스다의 펀지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7: 11-28). 에스라와 함께 많은 수의 포로들이 돌아왔다. 8:1-14은 이 일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8:15-36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도착 하였을 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 8:1에서는 말하는 이가 갑자기 ‘나’ 로 바뀐다. 이는 여기서 부터 에스라의 개인적 회상이 본문에 인용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4:8-6:18의 본문이 그 시대의 공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 전체는그시대의 국제 외교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 공문서들을 굳이 히브리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곧장 자신의 이야기에 옮겨 놓은 것이 틀림없다.


[참조] 하나님의 선한 손길

이러한 아람어의 사용은 마치 영어가 오늘날 국제어로 통용되는 것과 같다(다니엘 2: 4-7: 28도 아람어로 씌어졌다). 아람어가 앗수르 왕 산헤립 시대 때 외교관들의 언어로 이미 사용되어 진 것은 열왕기하 18장 26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아람어를 알지 못했지만 이것도 에스라셔가 씌어질 무렵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 예수님께서 전도사역올 하시던 무렵 우리가 신약에서 ‘달리다굼”과 “에바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팔레스타인에서는 히브리어가 아랍어로 대체되었다.

여러 문서가 인용되어 있는 에스라서의 아람어로 된 부분올 이해하려면 다음의 구조와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1) 4장 8-16절에서 한 탄원이 있는데 그것은 에스라의 지휘 하에 예루살렘 성올 튼튼히 하느라고 분주한 유다인들에 대한 항의이다. 이 청원은 사마리아 총독이 작성하여 아닥사스다 1세에게 보낸 것이다.


(2) 4장 17-22절에는 왕의 회담이 었다. 옛 기록들올 조사해 본 결과 예루살렘에는 실제로 종종 반란이 있었다(여기서 우리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의 옛 기록 문서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 결과는 유대인들이 성을 강화하는 작업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었다.


(3) 5장 7-17절에는 유브라데스 강 너머 지역의 총독이었던 닷드내의 공식 보고가 있는데 그는 다리오 왕에게 오래 전 시작된 성전 재건 공사에 관하여 의뢰하였다. 요청 사항은 바벨론의 옛 기록올 조사하여 고레스가 재건올 허락한 조서를 내린 것이 사실인지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4) 6장 3-5절에서는 재건올 허락하는 조서가 인용되어었다. 그 두루마리는 유력한 장소 바벨론이 아닌 메대에 있는 악메다에서 발견되었다. 문관들과 종복들이 그들의 일을 잘 해냈던 것이다.


(5) 6장 6-12절에서는 다리오왕이 내린 결정이 있다. 성전의 재건올 허락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지원받기도 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상의 기록된 모든 사실올 기억할 때 에스라서 4장 8절-6장 13절은 전혀 ‘삭막한”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님올 알게 된다. 에스라서는 위대한 왕이신 여호와께서 지상의 통치자들의 마음 속에서 일하시면서 마치 컴퓨터가 우주를 비행하는 로케트를 조종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들의 행동과 결정을 조종하시는 것올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매우 자주 언급된“하나님의 선한 손길” 을 보게 된다. 신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선한 손길”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가 우리의 왕이심으로 교회는 안전한 것이다. [반더발 성경연구 1, 코넬리우스 반더발, 526-527]



*9:1-10:44 유다 사람들이 이방 여민들과 통혼하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백성들 가운데 여러 대표들이 그에게 나아온다. 그 대표들은 당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이 대표들은 유다 사람들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경건한 기준을 어기고 이방인들과 혼인한 사실을 보고한다. 


에스라는 이런 사태에 경악한다. 그가 보기에 그런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9:1-15). 그들은 왜 유다 사람들과 이방인의 통혼을 그토록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였을까? 그 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특유의 정체성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 사람들과 비유다인들이 혼인하게 되면 이방 종교의 풍습과 신앙이 이스라엘의 예배에 유입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에스라는 통혼을 통하여 그들의 종교적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온 여덟 족속의 사람들을 직접 찾아낸다(9:1).


포로 생활 자체를 하나님이 이방 종교에 빠져든 당신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과정으로 보았기에 에스라의 분노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이스

라엘이 이방 민족과 통혼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함이요 언약의

파기였다. 다시말해 그것은 곧 여호와의 종속자인 이스라엘이 합법적인 통치자에 대항한 모반이었다.


하지만 언약 백생인 이스라엘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히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며, 그러한 방향으로 역사가 웅직이도록 섭리하신다. 결국 언약을 파기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에스라의 기도(9: 5-15)를 듣고 통혼을 포기, 자발적으로 언약올 새롭게 하며 언약 준수를 결심한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종일관 하나님은 곧 자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던 문제들 중의 하나(남쪽 유다가 이방 종교를 섬긴 일)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될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10:1-4). 에스라는 백성들이 이방 종교에 빠져드는 일을 막고자 행동을 개시한다(10:5-17).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저질렀지만 그 죄 때문에 빚어진 해악은 회개하면 치유될 수 있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온 유다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모은다. 이때(주전 458년 11-12월)는 마침 우기였던 것 같다. 에스라가 회중들에게 어그러진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제안하자 회중들은 압도적 지지를 보낸다(10:9-15).


결국 일종의 조사위원회가 구성된디{10:16-17) 석 달 뒤 이 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10:18-44). 그들은 그 지역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였다고 보고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레위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에스라는 이방 여인들과 혼인한 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아내와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똑같은 요구를 한다.


*10:44 결론 

에스라서는 여기서 급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렇게 급작스런 결말을 맺은 이유 중 하나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관계 때문이다. 영어성경들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별개의 책처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책은 본디 한 책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에스라서가 기록하고 있는 마지막 사건(조사위원회의 결과 발표)은 주전 457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느헤미야서는 이야기를 이어받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하는 기여하였던 주전445년의 일부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어 분명히 있겠지만, 에스라는 느헤미야때에도 일을 계속하면서 종교 부홍을 이끌게 된다. 종교 부홍이 어떻게 하여 일어나게 되었는가가 바로 느헤미야서의 주제다. 그렇게 본다면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서의 앞부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