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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OOKS BREAD/BIBLE

성경통독 365_역대기상 읽기

365 성경통독 역대상 읽기


역대기는 원래 상하가 나뉘어지지 않은 한 권의 책이었고, 열왕기상하와 같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열왕기상하가 예레미야에 의해 쓰여졌다면(반대의 견해들도 적지 않다), 유다 멸망기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돌아보게 할 목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한편, 역대기가 에스라에 의해서 쓰여졌다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다시 국가와 종교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그들의 뿌리와 역사를 알게 함으로써 새 힘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쓰여졌을 것이다. 


역대기는 아담으로부터 그 역사를 시작하고 있으며 특별히 성전과 남왕국 유다-참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중심으로 역사가 서술된다.




1-4장

역대상에 나오는 족보는 인류의 조상 아담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조상인 아브라함의 계보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조상인 유다와 다윗의 계보로 확장 및 구체화 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족보를 통해서 자신들이 이방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위대한 민족임을 밝히고 암담한 현실 가운데서 다시금 전성시대로의 회복을 소원했다.


•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아브라함의 후손들 1 :1-42

• 에돔 땅을 다스린 왕들 1 :43-54

• 유다의 후손들 2: 1-55

• 다윗의 후손들 3:1-24

• 유다 족보의 또 다른 기술 4: 1-23

• 시므온의 자손들 4:24-43


이 족보에서 몇 가지 주목할 사항들이 있다. 


먼저 1:19에 나오는 벨렉의 이름의 뜻은 ‘나뉘다’인데, 이 때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와 언어, 민족과 민족이 나뉘었다(1:19; 창 10:25). 


둘째, 이 족보는 가인의 족보를 생략하고 진행되어 노아의 세 아들 야벳, 함, 셈의 족보로 이어지고 이중 셈의 족보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온다. 


셋째,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1:34),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한 것은 열 두 지파의 아버지로서 민족의 이름이 되었을 뿐 아니라 회복의 길에 서있는 민족-역대기의 독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넷째,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가 선택을 받고 유다의 다섯 아들 중에서 며느리 다말과의 행음에서 얻은 아들인 베레스가 선택을 받았다(2:3~5). 


다섯째, 2장에서 중심 인물은 헤스론인데(2:9~55 전체가 헤스론의 후손의 족보다) 그는 베레스의 아들로서 야곱이 자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갈 때 동행했던 인물이다(창 46:12). 


여섯째, 9절의 글루배는 18절의 갈렙과 동일인이며, 이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광야에서 정탐군이 되었던 갈렙과는 다른 인물이다. 갈렙의 아들 훌은 광야에서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팔을 들어 기도할 때 아론과 함께 모세를 도왔던 지도자였고(2:19; 출 17:10~12) 성막 기술자 브살렐은 갈렙의 4대손이었다(2:20; 출 31:2).


역대기를 쓴 저자가 가장 염두에 둔 대상은 무려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이것을 염두에 둔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기록했다. 얼핏 보면 무미건조해 보이는 역대기의 족보 기록에는 이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기 민족에 대한 역대기 기자의 사랑과 열정이 담겨 있다. 


1-2장의 족보를 읽을 때 주의해서 봐야 할 것 


첫째,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봐야 한다. 

이것은 그냥 인간의 족보책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흐름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족보 속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놀랍게 이루어가신다. 이것을 알고 살도록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격려하신다. 특별히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큰 격려의 말씀이었겠는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선택과 유기에 대한 교훈이다. 

이 족보에는 살고 죽어간 많은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었지만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아니며 또 기록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무서울 만큼 분명한 선택과 유기의 분리가 있다. 회색지대는 없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니라 셋을, 야벳과 함이 아니라 셈을,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를, 유다의 다섯 아들 중에서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낳은 수치의 아들 베레스를, 그리고 그 후손 중 이새의 일곱 아들 중에서 막내 아들인 다윗을 선택하셨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3-4장의 족보를 읽을 때 주의해서 봐야 할 것


첫째, 3:1에서 다윗의 둘째 아들 다니엘은 삼하 3:3에서는 길르압이라고 소개되는데 동일인물이다. 


둘째, 3:5의 밧수아는 물론 밧세바를 가리킨다. 


셋째, 3:15의 요하난(요시야의 아들)은 여호아하스일 것이고, 16절의 여고냐는 유다의 22대왕 여호야긴과 동일인이다. 


넷째, 특별히 3장의 족보는 지금 포로에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하는 백성들에게 비록 그들의 나라가 멸망 당했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왕통과 자기 백성을 보존하사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셨음을 역대기의 일차적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보여준다. 그 이름은 스알디엘이나(3:17) 스룹바벨같은 이름들(3:19)이다. 


다섯째, 4:1에서 유다의 아들들로 소개되는 다섯 사람의 이름은 넓은 의미에서 자손들인데, 이렇게 아들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히브리 관습상 가능한 일이다. 


여섯째, 이 족보에서 유다 자손으로 소개되는 야베스란 인물은(4:9~10) 지나칠 법한 인물이지만, 특별히 성경이 두 구절의 짧은 설명으로 그를 소개하는 것은 특이하다. 그는 수년 전 한 베스트셀러로 인하여 특별하게 부각된 성경 인물인데, 그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인기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그는 고통 속에서 얻은 아들이었고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성경 기자는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응낙하심을 입었다. 성경 은 그가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일곱째, 4장에는 일반적인 성경 독자들에게 익숙한 인물이 기록되어있는데 사사 옷니엘(4:13)과 갈렙(4:15) 같은 인물들이다. 마지막으로 유다 지역의 일부에 정착했던 시므온 지파의 자손들이 미미하나마 소개된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다(4:24~43).



3-4장의 족보에서 얻는 교훈들이 있다. 


첫째, 나라가 망해도 백성은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역대기의 저자 에스라라면, 그는 아마도 이런 점을 이스라엘을 재건할 백성들에게 심어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유다가 망할 때, 왕은 시드기야였는데 하나님은 거기서 모든 것을 단절시키지 않으셨고 계속 역사하사 메시아의 왕통을 보존하셨다. 

다 끝난 것 같고 가정이나 사업이 다 무너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시거나, 주무시거나, 포기하시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고 선하신 손 안에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신다. 성도가 모든 상황에서 이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다. 


둘째, 보석같이 빛나는 인생 야베스, 수많은 인물을 열거하면서 왜 성경 기자는 특별히 야베스를 주목했을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석 같이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야베스는 절망 중에 소망을 주는 인물로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5-7장

역대기에 나오는 계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솔직하면서도 긍정적인 필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단을 중심으로 동서편 지파로 묶고 있다. 


이는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시점을 상기시킴으로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배여있는 곳임을 알게한다.


동시에 각 지파에게 주어진 소임을 잘 감당하고 각각의 기업들을 번성시킨 조상들의 역사를 떠올림으로서 포로에서 귀환한 자신들 또한 조상들의 번영에 동참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 르우벤, 갓 지파의 자손들 요단 동펀 지파의 행적 5:1-27

• 므낫세 반 지파의 자손 및 그들의 행적 6:1-7:2

• 레위 지파의 계보와 레위 자손 중의 성전봉사자와 그 계보 7:3-20


5-7장의 족보를 읽을 때 주의해서 봐야 할 것


첫째, 르우벤의 장자권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설명된다(5:1~2).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를 범함으로써(창 35:22) 장자권을 잃었다(창 49:4). 장자권은 지도력과 두 배의 유산을 받는 상속권으로 구성되는데, 유산 상속권은 요셉 지파-에브라이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되었다-에게, 지도력은 유다 지파-다윗과 메시야가 유다지파에서 나왔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록한다. 


둘째, 요단 동편에 속한 두 지파와 반 지파의 전쟁기록(5:18~22)이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다. 


셋째, 승리 뒤의 타락 이야기가 소개된다(5:25~26).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김으로써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넷째, 레위의 아들 그핫은 고핫과 동일인이다(6:1). 


다섯째, 레위 지파 대제사장의 이름으로(6:3~15) 등장하는 모든 이름이 다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아론의 첫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 제사를 드림으로 죽은 후에 세째 아들 엘르아살의 계열이 대제사장이 되는데, 사사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아론의 막내 아들 이다말의 가문에서 나오기도 하다가(엘리와 그 후손) 나중에 사독에 이르러 다시 엘르아살의 계열이 대제사장이 되었다. 역대상은 예루살렘 멸망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사닥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여섯째, 사무엘(6:28)은 사무엘상에서 에브라임 지파로 소개되는데 아마도 어려서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짐으로써 레위 지파에 편입(입양)되었거나 본래 에브라임의 기업에 사는 레위 지파였을 수도 있다. 


일곱째, 다윗이 임명한 성전 음악가들이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게 된 것을 설명한다(6:31~53). 이들 중 레위의 아들 그핫(고핫)의 후손 헤만은 고라의 자손으로도 불린다(6:38). 그가 <고라 자손의 노래>라고 된 열 한 편의 시편의 저자일 것이다. 또 레위의 아들 게르손 자손으로 헤만의 우편에서 섬긴 아삽은(6:39,43)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 열 두 편의 시편의 저자일 것이다. 그 외에 므라리 자손 에단이 헤만의 좌편에서 섬겼다(6:44). 여덟째,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48 성읍(6:54~81)은 ‘사방 지계 안에’ 있었는데(6:54)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는 야곱의 예언대로 성취된 것이다 .”


7장의 족보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에브라임에 대한 기록이다(7:20~27). 


에브라임은 블레셋 가드 사람과의 충돌로 두 아들 에셀과 엘르앗을 잃는다. 아마도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애굽의 고센 지방에서 목축을 하고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생긴 일일 것이다. 


매튜 헨리는 에셀과 엘르앗이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으려다가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드 사람들이 목축업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을 빼앗으려다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제안하며 이 부분의 오기 가능성을 제기한다. 


에브라임은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새로 아들을 주셨는데 그의 이름을 브리아라고 하였다. 브리아는 ‘고통 중에’ 혹은 ‘불행’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행과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 구원의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다. 새로 얻은 아들 브리아를 통하여 가나안의 정복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준비하고 계셨다. 


특별히 역대기 기자가 에브라임의 두 아들이 블레셋 가드 사람들에게 죽임 당한 사건을 여호수아 출생 기록 앞에 적은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나라를 재건하는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역대기는 이 족보 안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를 조금도 담고 있지 않는데 이는 이스라엘 왕들이 다 우상숭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초대 왕 사울과 그의 집안에 대한 족보 중 특별히 요나단의 자손만을 기록하는 것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인 애정 때문이다.



5-7장의 족보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첫째, 하나님의 주권은 세상 서열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함으로 자기 생애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자의 명분을 잃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막을 수 없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신앙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처음에 하나님을 의뢰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이후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써 영적 간음을 한 결과는 멸망이었다.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하는 백성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교훈이었을 것이다.


5-7장에서 역대기의 저자는 명분 상의 족보보다 실제적인 장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12지파의 계보를 다 언급하고 있지만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가 그 중심이 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에서 우리는 역대기 저자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은 실제적 장자 유다 지파와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이러한 회복의 바탕에는 레위 자손을 통한 성전기능의 회복과 하나님을 향한 바른 섬김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8-9장


8-9장의 이스라엘의 계보는 베냐민 지파를 언급 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다. 계보언급이 끝난 후에 다시금 포로 귀환된 현실로 돌아온다. 그들은 각 지파 별로 선별되어 예루살렘에 귀환하고 정착했다. 


각 지파의 계보를 통해서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은 자신들을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예루살렘의 옛 부흥을 꾀하고자 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야 할 이스라엘의 유일한 대안으로 하나님 중심의 다윗 왕국의 부활이 필연적임을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 8:1-40

•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 9:1-9

• 예루살렘에 정착한 제사장들과 례위인들 9:10-16

  레위인들의 직무와 성전 문지기들 9:17-34

• 사울의 족보 9:35-44


포로에서의 귀환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포로에서 먼저 귀환한 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느디님 사람들이었다(9:2).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 노동자들로, 주로 가나안 거민들이었다(민 31:30,47; 수 9:27; 스 8:20). 


이들이 제일 먼저 돌아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성전 재건이고 예배 회복이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족장들이 언제나 하나님께 단을 먼저 쌓았던 전통을 따르는 일이었다. 


또한 과거 예루살렘에 거하던 백성들이 돌아왔는데(9:3) 그들은 유다 족속 만이 아니라 베냐민과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 자손들이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가운데 예루살렘 거주자들은 아마도 북왕국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떠나 남쪽 유다로 내려와서 살았던 경건한 백성들이었거나(대하 11:16)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내려온 백성들일 것이다.


9:35~44은 앞서 8:29~38과 거의 동일한 사울의 족보를 반복한다. 왜 역대기 기자는 이것을 반복하는 것일까? 8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냐민 지파의 족보를 기록했다면 9장의 사울 가의 기록은 사울 가의 멸망과 다윗 왕조의 역사를 시작하는 도입부다. 9:40에서 요나단의 아들 므립바알은 므비보셋을 가리킨다.



8-9장의 족보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첫번째 교훈은 인생 최고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이사하고 직장을 결정하고 기타 모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예배와 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가? 역대기 기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이요, 특징이며 은혜를 받고 사는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죄인은 없고 숨겨질 수 있는 죄악도 없다. 우리는 이 말씀의 핵심을 바르게 듣고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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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온라인 개학이 시작되어 오전에 읽고 묵상하고 정리하던 묵상노트가 저녁시간으로 옮겨졌습니다. 

고군분투하여 다시 오전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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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부터 시작되는 왕들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역대기서를 읽을 때에 흐름올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왕들의 주변에는 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왕들이 선지자를 거역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더욱더 지극히 높은 선지자이며 스승이신 왕(예수 그리스도)을 간구하게 됩니다 [대하 20:15, 26:5, 29:25].


[역대하 20: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역대하 26:4-5] 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역대하 29:25] 왕이 레위 사람들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령하셨음이라. 


또한 역대기는 순전한 제사(예배)에 대한 책입니다. 

역대기서에서 교회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길 때에만 정치적으로도 강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살며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이 되면 예배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 보다 정치적 입장에서 얻을수 있는 것이 더 강하게 여겨지고 그것을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하 13:14-15, 20:21-22]


[역대하 13:14-15] 14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 15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역대하 20:21-22]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10장 

사울의 죽음

사무엘상 31장과 연결하여 봐야 한다.

 

#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와 그의 가문 모두가 사망 (1-7)



#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처리 (8-12)

사무엘상 31장에서는사울의 머리가 ‘벤산에  매달려 군중 앞에 전시되는데 그쳤지만 역대상 10장에서는 블레셋에 있는 다곤의 묘에 걸린다. 전에 다곤 신전의 신상이 법궤 앞에서 심판받아 목과 팔다리가 잘려 파괴된 것과 같이 이제 이스라엘의 악한 왕인 사울의 시체가 다곤 신전에서 심판받고 있다. 

이처럼 역대기 역사가는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라 할지라도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자의 말로는 심판받는 이방 우상과 다를 것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 역사서를 읽는 독자들이 어떠한 삶을 선택해야 할지 즉 다윗과 같은 약속과 승리의 삶인지 (11 장 이후) 사울과 같은 약속 파괴와 멸망의 삶인지 (10장)를 더욱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사울에 대한 평가 (13-14)

사울 스토리의 결론 부분, 그가 왜 망했는지를 밝힌다.


1) 그가 ‘여호와께 불성실하여'‘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에

2) 그가 신접한 자에게‘가르치기’를 청하고 오히려 여호와께는‘구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대기에서 사울 왕가의 멸망은
확실한 이유가 있는 ‘필연적인 멸망’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11장 

다윗왕의 등극과 예루살렘 입성

사무엘하 23장과 함께 봐야 함


# 다윗의 등극과 예루살렘 점령 &중건 (1-9, see 삼하 5:1-10)


새로운 수도를 획득하고 강화한 것은 단순히 군사 정치적인 이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으로써의 예루살렘이다. 

역대기 저자가 사무엘서와는 다르게(삼하 5:10-18. 정복 전쟁과 외교 동맹에 관한 기록이 먼저 기록됨)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동하는 일을 가장 먼저 기록한 것도 동일한 의미 즉 제의적&신학적 목적이 앞선다는 것을 강조한다(13. 15장). 

역대기에서 도성이 정복되고 보수된 이유는 바로 그 성소에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으로 임재하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9절은 사무엘하 5:10을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다윗 왕국의 강성함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역대상 11:9]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사무엘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다윗의 용사들 (10-47, see 삼하 23장)

이 다윗의 용사들의 많은 사람들은 일부는 다윗이 왕이 되기 이전에 다윗을 도운 용사들이며 일부는 다윗이 왕이된 다음에 나라의 틀을굳건히 하는 일을 도운 용사들이다.


특히 이들 중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야인생활을 할 때 다윗과 함께 아둘람 굴에서 함께 먹고 자며 준비된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22:1-2] 


[사무엘하 22:1-2]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아들람 굴에서 사울의 손길을 피해 숨어 지낼 때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은 다윗의 가족들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 하면 다윗과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왔을 때에 아버지는 다윗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골리앗을 상대하러 전쟁터에 갔을 때에 그의 형들은 그에게 화를 내며 그를 멸시했다.그런데 그런 형제들이 어려움을 피해 다윗이 있던 아둘람 굴로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사울의 통치 아래서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모든 자들(everyone who was in distress, and everyone who was in debt, and everyone who was bitter in soul) 400명이 다윗에게 몰려들었고 그는 그들의 리더가 되고 훗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용사들로 준비되어져 간다.  


그야말로 부글 부글 끓는 melting pot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들 무리는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소외된 갈릴리 출신의 죄인들을 모아 사도로 세우시고 교회의 기초로 삼으시는 장면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모아 교회로 세우시는 살짝 보여 준다. (비교. 막 1:32~34)


그들이 이 아둘람 굴 속에서 보낸 시간들은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쉽지 않고 가슴 졸이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다윗 자신의 형편도 딱하고 어려웠지만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모든 자들, 상처입은 자들을 자신의 동역자요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동지요 용사로 만들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사 시대 말기에 나타난 빈부격차와 지방세력들의 권력 남용 등으로 자신의 기업의 땅에서 뿌리뽑힌 난민들이었다. 다윗은 낡고 부패한 사사 시대 및 초기 왕정시기의 희생자들을 끌어 모아 역사변혁의 힘으로 전화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단지 박해받고 추격당하는 망명정치가가 아니라 새 시대의 여명을 기다리면서 그 새벽의 도래를 위하여 앞서 대중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동력화하는 조직적 영도자였다. [출처: 뉴스앤조이] [212호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무엘서⑥] 고난의 용광로에서 담금질되는 다윗]


그런 의미에서 15-19절에 나오는 세 용사들은 아마도 이 아둘람 굴 출신으로 보인다.



# 외국인 용사들의 명단 (41-47)

또한 이 명단들 가운데서 아디나 한 사람만이 분명한이스라엘 출신이다. 즉 41~47절의 용사들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이 외국인 용사들의 명단은 역대기가 묘사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열방을 품고 제사장 나라 노릇하는 나라라는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2장

# 다윗의 첫 용사들의 수와 그 특징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용사들의 대부분은 아둘람 출신들이지만 12장에 나오는 용사들의 명단에는 이미 시글락에서 부터 다윗을 찾아온 용사들이 많았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아둘람 굴에 찾아온 사람들 + 훈련된 군부세력에 대한 기록이던지 아둘람 출신들이 사실은 훈련된 군부세력들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호의적이다. 아둘람 굴에 찾아온 억울한 도망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고 기록한다 (22)


[역대하 12:22]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For from day to day men came to David to help him, until there was a great army, like an army of God.


그들은 잘 훈련되고 용맹하고 충성되며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지파들을 살펴보면


[역대상 12:32]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Of Issachar, men who had understanding of the times, to know what Israel ought to do, 200 chiefs, and all their kinsmen under their command.


[역대상 12:33]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요 Of Zebulun 50,000 seasoned troops, equipped for battle with all the weapons of war, to help David with singleness of purpose.


38절은 사울의 지도력이 이미 무너지고 민심과 군심의 기반이 다윗에게로 넘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역대하 12:38] 전투 태세를 갖춘 이 모든 군인들이 헤브론으로 와서 하나같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으며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All these, men of war, arrayed in battle order, came to Hebron with a whole heart to make David king over all Israel. Likewise, all the rest of Israel were of a single mind to make David king.


13장

사무엘상 6:1-11과 비교하면서 읽기


#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이스라엘의 제사(예배)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그 언약궤 안에는 석판에 새겨진 이스라엘을 창조한 언약의 말씀이 들어 있었다. 매해 이 언약궤 위에는 그동안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는 피가 뿌려져야 했다(레 16장). 


그런데 사울이 통치하던 격변기 동안 이 의식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즉, 잊혀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구심점으로서의 본래의 위치를 상실해 버렸다. 이때 온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다윗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곧 자기 왕국의 중심부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법궤는 블레셋이 빼앗아 간 것을 돌려 준 뒤에 멈춰 섰던 곳에서 20년 동안이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몇 개의 언덕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법궤를 운반하는 일이 중단되었다.


#  베레스 웃사 (웃사를 치심, 충돌하심)

그는  ‘새 마차’를 써서 존경심을 나타냈다고 해도(13 :7), 그런 방식으로 법궤를 운반하는 것은 사실상 옳지 않았다(15:13).  이런 부적절한 운송 방법은 다윗이 경솔하게 블레셋의 미신적 풍습을 답습하고 있으며(삼상 6:7),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15:12~15). 


결국 소들이 날뛰자 마부는 본능적으로 궤를 붙잡았다(13:9). 그러나 그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궤를 만질 수 있고  고핫이라는 레위 가족만이 궤를 운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민 4: 1- 15). 


법궤는 비록 사람의 손에 의해 운반되어도 법궤에 임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조작하거나 조종할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예배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의 종교적인 열정이 강해도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때를 존중하고 기다리고 경외해야 한다. 참된 예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안에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다.



14장

사무엘하 5:11-16 비교하며 읽기

# 다윗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다


# 다윗이 결혼하여(중혼) 자녀를 생산하다

더 많은 아내를 취함으로써 다윗은 백성들의 기대했던 대로 행동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왕으로서의 권력이 그에게 거의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그런 행통은 잘못된 것이었다(신 17: 18). 그의 어리석음은 훗날 그의 가족사에서 드러났다.


# 다윗이 침공해온 블레셋을 이기다

하나님께 묻고 출전하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때 싸우라!


다윗은 블레셋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8-12, 13-16절). 이 전투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구하고 있으며 (10- 14절), 이것이 바로 다윗이 승리하게 된 원동력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께 묻다’ 라는 전형적인 양식을 다윗의 온생애의 특징으로 제시한다(사울의 경우에 이 표현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참고 10:13- 14).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17)



15장


# 하나님의 궤를 옮길 준비를 하는 다윗

하나님의 규례대로 레위 사람과 제사장들을 준비시켜 궤를 옮기게 하다. 올바른 레위인의 가계를 택함으로써 다윗이 모세 언약에 충실했음을 강조한다. 또한 이 일은 이스라엘의 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예배)와 관련된 일임을 밝힌다(3)


#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다 (삼하 6:12-22)

웃사의 죽음(l3장)을 보고 난 다윗은 율법이 규정한 대로 궤를 옮기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 궤는 그의 숭리의 상징이 아니라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던 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노래와 춤이 뒤섞인 의식 절차를 밟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상 이스라엘을 존재케 하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예배의식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배의 날에 불러 모으시고 실제로 예배에 임하신다. 이것을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예배는 우리만의 종교적 감정의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 다윗왕이 기뻐 춤추는 것을 보고 미갈이 마음에 그를 업신여기다(29)

미갈에 대한 언급(29절. 참고 심하 6:16, 20~23)은 공동체의 관점에서 이해해야한다. 즉, 단순히 미갈이 다윗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유독 미갈만이 언약궤에 대한 관심과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불신앙의 전형으로 사울의 딸 미갈을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사울의 집이 하나님의 백성틀을 인도하기에 부적합함을다시 한 번 보여 준다.



16장


A 모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1 ~3절)

B 예루살렘의 예배를 위한 레위인들의 임명(4~6절)

C 다윗의 감사 찬양(7~36절)

B’ 기브온의 예배를 위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임명(37~42절)

A 다윗의 집을 위한 축복(43절)


# 하나님의 궤가 성막 안에 놓이다.

다윗은 새로이 장막을 예비했다. 그러나 성막과 번제단은 기브온에 그대로 있었다(39절). 궤는 이곳으로 맞아들여졌다. 이 궤는 그 옛날 광야를 지나도록 이스라엘을 인도했었고, 약속의 땅 입구 요단강 바닥에 멈춰 섰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이 궤가 안식을 취하러 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다스리고, 열국의 인정 을 받은 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그틀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언약이 성취되었다. 그 숱한 방황 끝에 궤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곳을 드러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다


칭송 감사 찬양 by 레위인


# 감사찬양을 드리다 

여기에 나타나는 시는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 도착하게 됨을 축하하는 찬양시다. 하나님은 과거 그분의 언약 백성들에게 보여 주신 신실하심으로 인해 찬양받으시며 (8~22절), 이를 근거로 다윗은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35절) 주실 것을 신뢰하며 간구한다. 여기에 나타나는 시는 기본적으로 세 개의 시편에 기초하고 있다.(시 105:1-15, 96:1-13, 106:47-48).


성공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틀은 그 성공의 원천과 그 성공이 그들에게로 왔던 과정을 살펴보라는 요청에 직면했다. 그들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번 경우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강조하는 경우에 속했다.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과 그가 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또한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와 하나되자고 요청하고 있는가? 


예배때 드려지는 찬송은 가장 먼저 하나님 중심(God-centered)여야 한다. 

우리의 기분과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노래보다 

삼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먼저 고백하고 찬송해야 한다.


# 기브온에서 번제를 드리다

13~ 16장의 언약궤 이야기의 결론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다윗의 축복으로 끝난다(3).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다윗의 손에 굳건하게 세워지며 

17장에서 맺어질 다윗 언약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춘 셈이다.


구약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굳게 세워지는 첫번째 걸음은 

하나님 중심적이고 말씀중심적인 예배의 재건과 회복에서 비롯된다

예배가 회복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갱신하신다.



17장 

“호의를 거절당하나 감사하는 다윗”


* 다윗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과 계시 그리고 감사기도 (삼하 7:1-17)


다윗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는 열심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지자 나단을 통해 막으신다. 다윗은 후에 이 이유를 자기의 전쟁의 생애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그의 피묻은 손으로는 생명의 여호와의 전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22:8). 


하지만 그와 함께 그는 그것을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6절에 하나님이 물으시는 의문문이 그것을 증명한다. 선한 열심과 의도도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것을 그의 평생에, 그의 인생의 절정기에도 철저히 가르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어했지만, 사실상 다윗의 집을 짓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바이트’는 왕조, 성전, 집안(1 6:43)을 뜻하기도 한다.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나는  첫 번째 집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세우실 왕조이며 (10, 14절), 두 번째 집은 성전이다(12절).


다윗의 왕국이 계속 되리라는 약속과 하나님의 집을 세울 한 아들이 나오리라는 약속은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읽을 수 있다.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웠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머리가 되셔서 그의 새로운 성전을 세우고 계신다(에베소서 2: 19-22 참조)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Unless the Lord builds the house, those who build it labor in vain. Unless the Lord watches over the city, the watchman stays awake in vain.



*다윗의 감사기도 (삼하 7:18-29)


(1)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찬양(16~22절)


주와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There is none like you!


(2) 하나님께 약속을지켜 주실 것을요청 (23~27절)


[역대상 17:27]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 Now you have been pleased to bless the house of your servant, that it may continue forever before you, for it is you, O LORD, who have blessed, and it is blessed forever.”



18


*다윗의 승전기록 (삼하 8:1-18)


블레셋은 아직까지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14장에서 블레셋이 예루살렘 근처까지 쳐들어 왔다가 쫓겨간 이야기를 원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다윗이 그들의 땅으로 쳐 들어가 그들의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를 빼앗았다(13:3).


다윗은 정말로 뜻하지 않게, 하닷에셀이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해 진지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을 때 공격을 개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승리에 승리가 잇달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야말로 이러한 승리의 참된 이유였다(6).


[역대상 1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Then David put garrisons in Syria of Damascus, and the Syrians became servants to David and brought tribute. And the LORD gave victory to David wherever he went.


또한 곳곳에 정복된 나라들이나 우호적인 나라들이 있는 것을 볼 때, 만민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도 또한 볼 수 있다(6, 13절 14:17).


[역대상 18:13]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Then he put garrisons in Edom, and all the Edomites became David’s servants. And the LORD gave victory to David wherever he went.


[역대상 14:17]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 And the fame of David went out into all lands, and the LORD brought the fear of him upon all nations.


이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 에 병합되지 않고서 어떻게 다스려졌는지를 살펴보면 정복한 나라들에는 수비대가 파견되었고 조공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의 백성은 이방인 그대로였다. 오직 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기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상들을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고통을 자초해 왔다. 그러므로 세례를 대충 그리고 서둘러 준다거나 직분자를 세우는 일을 허술하게 하는 것은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시며 친히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세례를 철저히 명하시며 직분을 교회에 직분을 선물로 주시며 그 자격을 철저히 하셨다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중대한 책임이었다. 다윗은 그 직무가 신명기 16:18-20의 정신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틀에게 여러 가지 직무를 대신하게 했고, 자기의 아들들의 도움도 받았다.(14)


[창세기 18:18-19]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by doing righteousness and justice)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신명기 16:18-20] 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시편 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your throne;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go before you.


[시편 97:1-2]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1 The LORD reigns, let the earth rejoice; let the many coastlands be glad! 2 Clouds and thick darkness are all around him;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his 


예수님을 보여주는 다윗의 통치 (렘 23:5, 33:15-16)


[예레미야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야 33:15-16]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왕 

다윗의 후손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공의를 구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but to do justice, and to love kindness,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19


*다윗과 암몬과 아람을 치다 (삼하 10:1-19)


다윗의 선한 성품이 2절에 잘 나타나있다. 암몬과의 전쟁은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에 나하스와 가졌던 좋은 관계가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하스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선례를 따르지 않고 방백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이웃을 의심쩍게 보았고 자기들의 입지가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사절틀을 모욕했고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을 모욕하여 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철저히 패한다.


전쟁이 시작 될 때 요압은 ‘우리 하나님의 성읍틀을 위하여 힘을 내자’(13절)라고 격려하는데 이것은 역대기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믿음과 고백에 기초해 동생을 격려하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다. 이 기도 후에 기록된 승리의 기록(14~15절)은 여호와께서 요압의 기도를 듣고 도우셨음을보여 준다.



20


*다윗이 랍바를 함락시키다 (삼하 12:26-31)


그 이듬해 암몬과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요압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저자는 다윗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 뒤 사무엘서에 나오는 수치스러운 밧세바와의 이야기(삼하 11, 12장)는 기록하지 않고 건너 뛰어 암몬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따라서 다윗이 지은 큰 죄는 역대기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사무엘서에서나 읽을 수 있다. 이것은단순히  용비어천가 처럼 왕의 허물은 감추고 잘한 것만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순종하는 이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상선벌악하시는 주권을 강조하는 역대기의 특징 때문이며 죄로 부터 돌이킨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이 드러난 기록방식이다.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 (삼하 21:15-22)


블레셋을 볼 때, 거인들의 군사적 이점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 현상은 어떤 특별한 집안의 유전적 결함에서 나온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에도 그틀을 이길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럴 수 있음을보여 주었다.


[역대상 20:8]  가드의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 These were descended from the giants in Gath, and they fell by the hand of David and by the hand of his servants.


21장 | 자만으로 백성을 죽게 한 다윗


자기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윗은 자기의 강성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싶었다. 역대기 기자는 밧세바에 대한 다윗의 개인적인 죄는 다루지 않고 지나쳤지만 이 실패에 대해서는 사무엘서 만큼이나 충분히 다루고 있다.


다윗의 승리는 자기 자신의 전략이나 수의 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적들을 그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온 것 이었다(ex 14 :8-17). 이는 마치 여라고에서(수 5:13-14) 다른 힘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싸웠던 것과 같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만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자기의 죄를 깨닫자 다윗은 자기가 보기에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끝날 수 있는 벌을 선택했으나  거기에 또 다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났다(15). 다윗이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다윗은 7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자기의 죄의 값을 대신 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삶도 죽옴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다윗이 자기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해도(30) 그의 제사는 받아들여졌다(26-27). 회개의 표시로 그가 샀던 타작 마당 곧 왕이 자기의 잘못을 고백했던 장소가 앞으로 천년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 처소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성전은 죄가 해결되는 장소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성전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소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22장 | 성전건축을 위한 준비


성전올 건축할 자는 그 성전이 전쟁 기념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피흘림으로 자기의 세력을 구축한 사람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평강’ 곧 솔로몬이라 불리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인 까닭이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례와 규례를 삼가 지키고 행해야 했다(12).


다윗은 솔로몬에게 격려 하기를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라고말한다. 이는 특별히 여호수아 1:6~7에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시용 되었던 격려로 역대기가 이 표현을 다시 인용하여 솔로몬에 대한 당부와 격려로 사용하고 있다(13).


여기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은 그의 타고난 자연적인 성품을 굳세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명령을 지키는 일에 그러하라는 말이다.


역대기에는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우호적인 관심이 있다. 히스기야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이방인과 유다에 거한 이방인이 유월절 행사에 함께 참여한다(대하 30:25). 2절에서 이방인들이 성전 건축에 참여하는 것은 아마도 단순히 노동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어 성전을 이뤄가는 모습을 언뜻 비추어 준다.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다윗은 자신이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는 일을 아들이 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간 이들도 바벨론에서 답답한 시간을 보냈지만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사람들의 심령을 재건할 다음 세대의 일군을 준비했다. 


아비 세대의 준비를 통해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과 같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 재건축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학개처럼 우리의 다음 세대들의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자신 안에 사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도록, 신앙을 재건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여기며 살도록 격려하고 가르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23-26장 | 성전봉사를 위한 준비 by 다윗


*성전 건축과 예배를 준비하는 노년의 다윗(23:1~2)

22장에서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들과 건축가들을 준비한 다윗은 이제 성전 건축을 주도할 자들과 성전에서 섬길 자들을 준비한다. 즉 연로한 다윗은 먼저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을 소집한다. 성전 건축에 대한 준비가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함께 이뤄짐을 알 수 있다.


*레위인들의 조직과 직무(23:3~32)

민수기 3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동해 온 성막과 그것의 모든 기구들에 대한 돌봄이 아닌 여호와께서 영원히 거하실 성전과 관련해 레위인틀이 사역할 새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다윗의 예측과 준비는 레위인들의 나이를 30세 이상에서 20세 이상으로 조정한 것에서도 알수 있다(27). 이들의 직무는성전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성물을 드릴 때 아론 자손들을 돕고 찬송을 하며 절기에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28~32절).


이제 법궤와 성막은 영원한 집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운반 가능한 성막을 옮기고 다시 세우는 일을 맡았던 이들의 임무는 달라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곧 그들이 남아 돈다거나 그들의 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곳에 고정된 건물은 의레 이동식 장막보다 더 정결함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성전 뜰을 청소하는 일은 아주 하잘 것 없는 직책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된 노역과 반대되는 일이 바로 찬양의 특권이었다(23:30)


*제사장들의 조직과 직무(24:1 ~19)

이스라엘의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장소였다. 따라서 누구라도 원하는 대로 덮어놓고 무작정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개인이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이곳은 열방이 지켜 볼 이 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이었다. 


*남은 레위인들(24 :20~31)과 


*찬송을 맡은 레위인들(25장)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음악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본질적으로 음악은 경배하는 자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역할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와 순서는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음악을 맡은 레위인들도 몇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이 가운데는 타악기를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고 현악기를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선율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었다. 


시편이나 찬송을 짓는 것은 사실상 ‘예언’ 이라는 용어 속에 포함될 수 있는데 (25:1- 3). 그러나 일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예언적 기능이 아니라 제사 의식에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받으심이나 그분의 인애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의미에서 예언적 직무를 행한다는 것이다(대하 20:14 이하).


즉 찬양하는 자들은 예배에서 시편을 노래하거나 이미 영감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복과 용서는 물론이고 그들의 기도와 여호와의 응답 등을 전달하는 예언적(설교적) 직무를 행했을 것이다(삼상 10:5-6: 왕하 3:15).


이러한 직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감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러한 직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예술적 자극은 왕에게서 나왔다. 이는 시와 악기에 능한 다윗 자신의 솜씨에 대한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성전 문지기들의 조직과 직무(26 : 1~19)

성전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오늘날로 말하연 공권력 26:1-19에 언급된 문지기들이 있어야 했다. 그들은 금지 구역 내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정확한 시간에 성전 문올 열고 닫아야 했다. 그들은 또한 길 잃은 동물들 같이 거룩한 성전을 망칠지도 모를 것을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도 했을 것이다. 

사도행전 21: 30과 마태복음 27: 65에서는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또한 제비 뽑아 직무를 얻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 자기가 더 어려운 직책을 맡았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성전 곳간 맡은 자들의 조직(26:20~28)

오늘날과 그 임무가 동일한 고지기들(26:20-28) 은 정규적인 십일조나 헌물과는 대조적으로 임의로 드리는 비정기적인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한 그룹이 맡았다(26:26-28).


*관리들과 재판관들의 조직과 직무(26:29~32)

유사(관리)와 재판관(26:29-32)은 세금이나 십일조를 관리하고 거두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서 성전과 국가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다윗의 이러한 철저하고 꼼꼼한 정비와 준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신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의 중요성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배 만이 진정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성전 건축에 대한 자신의 열망이 거절되는 과정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 세대의 예배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시는 대로 예배의 준비를 명하고 실행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자들과 같이 우리가 즐기고 나의 종교성을 만족시켜 주는 예배로 전환될 위험이 항상 있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교훈을 주셨고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시는 예배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27장 | 모든 가문의 우두머리와 관원들


군사조직(1-15)


열두지파의 지휘관들(16-24)


왕의 재산을 맡은 자들(25-31)


다윗을 섬기는 자들(32-34)


모든 리더쉽들의 조직에 대한 기록은 성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나라 전체의 것으로 연결시키는 의도를 드러낸다. 민족의 삶이 근본적으로 신앙적이며 세속적인 일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연결되어 이뤄짐을 보여 준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참 성전이신 예수님의 시대 곧 새 언약의 시대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다. 이런 새 언약 아래서 예배는 장소보다 하나님을 섬기는자들, 예배자의 준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시대에 요청되는 참된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기 때문이다(요4:23~24).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구약의 성전이 아닌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 그것을 세워 가는 성전의 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가 새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이자 교회이므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뒤바꿔 건물과 외형에만 헌신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는 그분의 몸된 교회 곧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에 헌신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직분자는 자신들의 시대에 맞는 성경적 역할을 분명히 알아야하고 자신들의 섬김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질서있게 예배하는 일과 연결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28-29장 | 다윗이 성전 건축을 지시하고 준비하다


*성전 건축과 관련해 솔로몬을 소개하고 권면하는 다윗(28:1-10)

솔로몬의 선택받음은 유다의 경우와 같이 다윗이 행한 불미스러운 일의 결과와 관련이 있다(심하 11~12장; 창 38장). 이것은 인간의 실수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에 의해 지배 됨을 보여 준다. 인생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의 역할은 한계가 있으며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다윗의 신앙과 고백을 보여준다. 악한 결정을 선으로 바꾸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성전 건축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인도하는 다윗(28: 11-21)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던 성전의 설계를 그에게 말해 주었는데, 성전의 설계란 아마도 성막의 설계(출 25장 이하)를 나무나 돌로 된 영구적인 건물에 맞게 고친 형태였을것이다.

성막에 대한 설계가 영감을 통해 모세에게 전달되었고 모세는 그 설계를 브살렐에게 전수했던 것(출 31:2-38:22)처럼, 성전에 대한 설계가 다윗에게 주어졌으며 이 설계는 다윗에 의해 솔로몬에게 전달되는 유사점을 보인다.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을 호소하는 다윗(29:1-9)

성전을 짓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소유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내놓았고(29:3-5), 솔선수범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요청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백성이 기쁨에 가득 찼다. 성전은 ‘황제 전용’ 예배당이 아니라 진실로 이스라엘의 성소가 될 것이었다. 다윗 왕조와 이스라엘의 번영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참 왕이심을 기억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성전 건축의 사명은 ‘큰일’이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다윗(29:10-19)


[역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다윗의 죽음(29:20-30)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뛰어난솔로몬의 이상적 왕권(23-25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권에 근거한다(28:5: 29:11, 23). 23절의 “여호와께서 주신 위에 앉아’는 원어로 보면 ‘여호와의 왕위에 앉아’이다. 솔로몬은 참된 왕이신 여호와의 왕좌에 앉아 여호와의 나라를 다스리며 여호와로부터 존귀와 위엄을 얻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왕국의 진정한 왕이심을 고백한다.



*정리하면서

성전 건축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오늘날 예배당이 아닌 진정한 성전이고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성전의 기능과 의미를 성취하신 예수님과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물질로써 자원해 헌신해야 한다(고후 8-9장),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자신의 왕국이나 사적 인간관계를 세워 나가는 곳이 아님을 알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세워 나가는데 헌신해야한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구약이나 신약은하나님의 먼저주심에 대한 반응으로써 헌신을 요구하고 있지,  헌신하면 복을준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신 15:7-11: 고후 9:7-8). 


이런 마음과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일들 곧 선교와 구제 그리고 교육에 물질로 헌신해야 한다.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는 헌신은 부담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자원하는 헌신은 모두에게 기쁨을 가져오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29:9. 17: 빌 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