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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평화주의, 그리고 C.S. 루이스


성공회와 평화주의, 그리고 C.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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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번째는 성공회의 평화주의에 대한 생각입니다.
요즘 성공회 신도인 C.S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글중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이해는 하지만,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물론 기독교 사상가인 그의 사견이겠지만,성공회에서는 평화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성공회의 입장도 설명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하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요,자세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신부님이 부디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시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김재홍 바우로 드림

성공회와 평화주의, 그리고 C.S. 루이스

어려운 주제여서 간단히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이와 관련한 전체적인 논의의 상을 그려보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한 공부의 방향이라는 셈으로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평화주의란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현실에서 이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으로서 ‘정당한 전쟁”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나온 것을 염두해야 합니다.

우선 예로 들으신 아시다시피 C.S. 루이스는 전형적인 성공회 신자인데도,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 신앙 저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특히 최근 영화화된 “나르니아 연대기”로 더욱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양상에서 전쟁과 그분의 신앙적 신학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성공회 신자라는 측면에서 루이스는 서방 그리스도교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발전시킨 전쟁과 폭력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그리고 이후 칼빈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지는 “정당한 전쟁” 이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전쟁은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많은 죽음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전쟁 속에서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대항적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정당한 전쟁을 위해서 이에 합당한 원칙들, 즉 정당한 이유, 상응한 정의, 적법한 권위, 좋은 의도, 성공의 가능성, 인명 손실의 비례 우위성, 최후의 수단으로서 폭력의 사용 등과 같은 원칙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어쨌든 나쁜 폭력에서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대항 폭력, 즉 좋은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평화주의자들은 폭력에 대항한 폭력이 – 특히 그것이 전쟁일 경우 – 사람의 생명에 손상을 가하는 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 그리고 종교개혁기 이후의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 (재침례파,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에서 그 성서적, 역사적인 근거를 찾습니다.

C.S. 루이스는, 말씀하신 그 유명한 “단순한 그리스도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영국의 평화주의자들에 논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영국국영방송(BBC)를 통한 방송대본을 기초로 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 중에 있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그분의 가장 중요한 글은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것인데, 이 역시 1941년 전쟁 중에 발표된 것입니다 (출판은 되지 않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왜 미국에서 1980년대에? 의문을 가져볼 만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C.S. 루이스는 위의 정당한 전쟁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평화주의자들이 여러 면에서 현실성이 부족하며, 사람들의 감정의 현실이나 논리, 그리고 국가의 적법한 권위라는 측면에서 오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역사에서 보자면 전쟁은 쓸모 없는 나쁜 전쟁과, 유익한 좋은 전쟁이 모두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폭력에 희생될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폭력을 저지시키려 폭력을 동시에 행사하여 그 희생을 중지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되고, 또한 적법한 국가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면 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징병제에 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C.S. 루이스의 “나르니아 연대기” 영화에서도 보듯이,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선악의 전형적인 이분법이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환타지 소설에서 그는 선약의 갈등 속에서 전쟁이라는 이미지로 선의 승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 따른 선의 승리 과정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사건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구체적인 전쟁 과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악에 대항한 전쟁으로 표상한다면, 거꾸로 전쟁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재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C.S. 루이스의 전쟁관은 최소한 그렇게 제게 비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영국에서 이른바 평화주의가 가장 크게 성장한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국교로서 영국성공회는 종교의 통일성을 위해 다른 교파들을 억압하기도 했고, 국가적 권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평화주의 운동의 씨앗이 되었던 퀘이커 등과 같은 교파들을 억눌러왔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성공회의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나타나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공회 평화주의 연대”(Anglican Pacifist Fellowship)와 같은 평화운동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다만 당시 전쟁 중에 영국 정부는 이러한 평화운동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고 방송 금지를 시키는 상황 속에서, C.S. 루이스는 그의 “정당한 전쟁”론을 방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 상황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국성공회 내의 굵직한 성직자들의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헌신과 노력 때문인지, 영국 정부는 강제 징집제를 실시하지 않고 선택적 징집제, 즉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성공회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1930년 1948년에 있었던 세계성공회 주교회의인 람베스 회의에서 부분적으로 평화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평화주의 내에도 그 원칙과 그 적용 범위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그룹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인 그룹도 있고, 좀더 급진적이고 원칙주의적 그룹에서 실용주의적 그룹까지 다양합니다. 일부에서는 정당한 전쟁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최후의 보루로 폭력적인 개입을 인정하는 주장도 혼재합니다. 하나의 답변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지요.

하나의 타협점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점을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서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분은 언젠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이 양심을 갖고 있다면, 간디처럼 비폭력의 길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대적자가 히틀러처럼 양심이 없다면, 그때는 본회퍼의 길을 따르십시오.”

간디는 인도의 비폭력저항 운동의 대표자인 것을 잘 아실테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나찌 정권 하에서 교회가 히틀러에 협력하는 것을 반대하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이끌면서, 히틀러 암살 음도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입니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본회퍼는 “정당한 전쟁론”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C.S. 루이스의 생각과 근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C.S. 루이스 역시 독일의 침공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있었지만, 본회퍼 만큼 급박한 상황의 마지막 수단으로 적용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루이스의 경우는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일반화시키고 실제로 누구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들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그의 말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 없는 결론이 비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전쟁에는 악인도 다 이유가 있고, 선인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담 후세인도 이유가 있고, 부시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더 죽이고 있지요. 여기에 평화주의의 끈질긴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정당한 전쟁”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앞서 인용한 비폭력주의자 마틴 루터 킹의 말도, 어떤 처지에 있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이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우파 복음주의자 가운데 하나인 팻 로버슨 목사는 얼마 전 남미 베네주엘라 좌파 정권의 차베스 대통령을 암살이라도 해서 축출해야 한다면서, 본회퍼의 경우를 인용했습니다.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이들, 그리고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우파 복음주의자들은 본회퍼의 전체 신학이 아무리 자신들의 신학과 정반대일지라도, 그 몇 마디 말과 상황을 교묘히 조작해서 자기 말로 만드는 데는 혀를 내두를 만한 특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어떤 권력이, 그리고 어떤 상황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느냐가 이런 문제를 분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 역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씀이 전해주는 고민 가운데 있습니다. 고전적인 정당한 전쟁론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가 하면, 급진적인 평화주의가가 되지도 못합니다. 이런 처지에서 평화주의의 한 움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해서도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성공회 신문에 한국 성공회에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토막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에 찬성하고 있지만, 이는 사견일 뿐 한국성공회의 전체 의견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성공회의 많은 교회와 단체들은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고, 양심적 병역 거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떤 확실한 답변도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하나의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을 함께 깨닫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길이 무엇인지를 이런 문제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어떤 이론과 어떤 대가의 말보다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걸어가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정한 바탕일테니까요. 사순절이 바로 그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의 가장 분명한 표상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다시 전쟁과 폭력, 그리고 평화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