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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1-9 주석

행 17:1-9절의 메시지( 송영목 교수 사도행전 주석)

바울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들어간다 (1절). 이 길은 동양 세계를 로마로 잇는 에그나티아 대로 (the Egnatian Way)를 따라간 것이다. 현대의 Saloniki인 데살로니가의 인구는 바울 당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Bruce, 1984:343). 

바울은 3번에 걸친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며 (2절) 뜻을 풀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증명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한다 (3절). 경건한 헬라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 (a considerable number of women of high station)이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4절), 유대인들은 시장의 괴악한 자들 (some bad characters)을 동원하여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 (Jason)의 집에 들어가 바울 일행을 잡으려고 한다 (5절). 

그들이 바울 일행을 발견치 못하자 야손과 형제를 끌고 읍장들 (politarchas, 시의 지도자, the chief magistrates) 앞에 가서, 천하를 어지럽히던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예수님을 다른 임금으로 믿었다고 큰 소리로 말한다 (6-7절). 이 구절에서 “가이사 외에는 다른 왕이 없다”는 요 19:15절이 메아리친다. 물론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님이 왕이심을 가르쳤을 것이고 종말론적인 색체가 강한 메시지를 던졌을 것이다 (참고. 살전 1:9-10). 무리와 읍장들이 소동하여 (8절), 야손과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 (bond)을 받고 놓아준다 (9절). 여기서 ‘보’라는 말은 바울의 지인 중에서 바울이 적어도 그 읍장의 임기 동안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보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Bruce, 1984:345). 행 20:4절에 의하면, 이 무렵 데살로니가의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개종했다.

 

행 17:1-9절 데살로니가 전도(두란노 HOW 주석 한천설 교수)

Ⅰ. 데살로니가 전도(17:1~9)

 1. 데살로니가의 역사적 배경

데살로니가 성(城)과 항구는 칼케돈 반도의 서부 지역에 있는 테르메 만(Thermaic Gulf, 지금의 데살로니키 만) 가까이에 있었다. 데살로니가는 주전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더(Cassander)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그는 이 성읍을 빌립 2세의 딸인 자기 아내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주전 167년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를 네 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데살로니가는 두 번째 구역의 수도가 되었고, 주전 146년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속주(屬州)로 만들었을 때 속주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전 42년부터 이 성읍은 스스로 세운 ‘읍장들’(politarchs)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유시의 지위를 누렸다.

아마 이 ‘읍장’이라는 직함은 마케도니아 성읍들의 주요 행정관들에게 붙여졌던 특별한 직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 읍장이라는 명칭이 데살로니가의 행정 책임자라는 의미로 사용된 사도행전 17장 6절을 제외하고는 헬라 문헌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이 시대에 속하는 데살로니가와 많은 다른 마케도니아 성읍들의 비명들에서는 자주 발견된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이 도시에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북서 방향과 남동 방향으로 관통하여 성읍을 지나고 있었는데, 오늘날도 이 길을 따라 뚫려 있는 도로는 부분적으로 그때와 동일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인종적으로 볼 때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큰 성읍인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인종들이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도시에 유대인 거류지와 회당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중에 바나바와 실라 같은 동료들과 더불어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17:1~2).

 2. 바울의 규례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원칙을 고수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 13~28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선교행적에서 볼 수 있는데 즉 안디옥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이르는 이방 문화권 선교 과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회당을 찾아간 이유는 구원사에서 “복음이 유대인에게 먼저 선포되어야 한다”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2, 그곳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약과 유대교를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준비된 사람들이 많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당시 유대인의 회당은 그들의 예배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여행객의 숙소나 직업 알선소, 혹은 유대인들의 모임의 장소로서 그들 삶의 중심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울에게는 처음 방문하는 낯선 도시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회당에서 방을 얻어 머무는 것도 중요했고, 또 직업 알선을 받는 것도 중요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회당은 바울에게 있어서 선교 여행 경비를 조달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바울은 새로운 도시에 가면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그것은 회당 예배의 참석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회당에서는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 때마다 사회를 보는 회당장이 있었다. 회당장은 매 안식일마다 정해진 성경을 읽고 회중에게 “누가 성경 말씀을 잘 강해해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물었다. 바울은 바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약을 강해하고, “이 예언이 예수에 의해 성취되어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라고 선포하곤 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물론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방인들, 즉 이방인으로서 언약 백성의 표인 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나, 아직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에 매력을 느껴 율법을 지키며 회당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던 이방인들은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바울의 말을 더 청종하고자 하였다.

 

3. 데살로니가 메시지의 내용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규례대로’ 회당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서 성경을 해석하고 강론하면서 그 성경 말씀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메시지에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메시아가 고난을 당했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설명하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니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즉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설교했다(17:2~3).

즉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을 ‘구속사의 대전환점’(The Great Turning Point in the Redemptive?istory)이요 ‘절정’으로 이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구속의 새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기독론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구약을 잘 알고 있었고, 구약에서 시작된 그 약속들이 어떻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전도의 결과

이 3주간의 전도 결과, 그 반응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바울은 몇몇 유대인들과 이방신을 섬기던 많은 헬라인의 무리와 유력한 인사들의 부인들을 기독교인으로 얻을 수 있었다(17:4).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 바울 일행을 접대했던 야손(Jason)3은 아마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때에 회개한 중요한 사람은 데마(딤후 4:10), 아리스다고(행 19:29, 20:4, 27:2, 골 4:10), 세군도(행 20:4), 가이오(행 19:29) 등으로 보인다.

그들이 더 이상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전도자들은 데살로니가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 결과 데살로니가 성읍을 떠날 즈음에는 그들이 설립한 기독교 공동체에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론은 이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수신자로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에서 아주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러나 수주 후에 바울 일행은 소동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소동을 일으킨 주체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이방인들, 즉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회당에 참여하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는 것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전도의 열매를 바울에게 빼앗기는 것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처단하기 위해 군중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증거로 제시했던 죄목이 “예수를 ‘왕’(basileuv")으로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이끌고 갔던 것이다. 그들이 방문자들에게 덮어씌웠던 죄명은 엄청나게 중대한 것이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17:6). 이 말속에는 체제 전복이나 선동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말을 좀더 정확히 옮겨보면, “세계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데 야손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활동은 명백히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하나의 ‘황제’(왕)4 예수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6~7절)라는 뜻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로마는 황제 숭배 사상을 강요하고 그것을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가이사와 그 후계자들은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고, 17장 7절에 나오는 ‘가이사의 명’은 황제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로마 황제 숭배와 더불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광범위하게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자들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 땅에서 특히 활발했는데, 그들의 활동은 본토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호전적인 메시아 사상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열병처럼 번져나갔고 제국의 속주와 성읍들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그러한 소요와 바울의 ‘메시아 사상’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했다.

로마시에서도 최근에 그러한 소요가 일어나서 그 결과 글라우디오는 유대인 공동체를 수도에서 추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다(행 18:2 참조).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 격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분규가 일어난 사건이 있은 직후, 글라우디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엄중한 서한을 보내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호전적인 메시아 사상을 지닌 유대인 공동체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는 일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황제의 명을 거슬러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kuvrio"),’ 또는 ‘왕’이라 부르고, 그가 통치하는 새시대가 왔다고 했을 때 어떻게 보면 로마 정부와의 정치적 대결을 초래한 듯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바울 자신은 제국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데 주의를 기울였지만, 바울이 가는 성읍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드물었다. 데살로니가 읍장들 앞에서 바울에게 덮어씌운 고소는 이처럼 정말 교묘하게 짜여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일행이 거역했다고 고소했던 칙령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가이사의 칙령이란 전체적인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어떤 특정한 칙령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5 소동을 일으킨 자들이 바울과 그 동료들을 끌고 가고자 했던 데살로니가의 ‘데모스’, 즉 시민회(市民會)와 읍장들은 제국의 여러 지역에 있는 다른 성읍들이 그랬듯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한 서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소를 할 근거를 제시받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하도록 요구받았을 것이다.

 

5. 데살로니가를 떠나는 바울

읍장들은 이러한 중대한 죄명의 고소 사건을 듣고 그 진위를 조사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음모에 쉽사리 말려들지는 않았다. 관리들은 이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세 전도자들을 집에 받아들였던 야손에게 그의 집에 있던 손님들, 특히 바울이 치안을 방해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보장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9절). 이를 보장하기 위해 야손은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기를 막는 일에 동의한다. 읍장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조치에는 바울이 즉시 데살로니가를 떠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떠나기 싫어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의 안위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이미 야손이 읍장에게 바울 일행을 내보내겠다는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도 일행이 베뢰아로 급작스럽게 떠난 일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10절). 후에 이런 상황을 빗대어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아마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성도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피했던 비겁한 사람이었다. 또한 바울은 돈을 받을 정도의 기간만 데살로니가에 머물다가, 또 다른 여정 가운데서 만나는 귀부인들에게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속셈으로 그곳을 미련 없이 떠난 삯꾼 목자이다.”

이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 당시 데살로니가를 그렇게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살전 2:17). 더군다나 바울 자신은 야손의 보증이 발효되는 동안 데살로니가에 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제 막 세워놓은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가르침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소동의 여파와 강제추방으로 인해 어린 교회가 박해 앞에 놓였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