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배경
스코틀랜드는 문명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예술은 놀라울 정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와 비교할 때 백성들은 야만적(barbarous) 이었고, 땅은 개척되지 못했다. 여러 세기 동안 민족(nation)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로마 제국은 어떤 시기에도 스코틀랜드를 차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종교는 조잡했고 미신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의 명백한 우위성 앞에 굴복하였다. 즉 스코틀랜드는 본래 외국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국가였다.
(1) 성 니니안(St. Ninian)
스코틀랜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이름은 성니니안(St. Ninian)의 이름이다.
그는 4세기 중엽에 태어났고 솔웨이(the Solway) 지역의 족장의 아들이었다. 니니안은 로마에서 정확하게 기독교 진리를 배웠다. 당시에 사람들이 로마에 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에 니니안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주후 381년부터 385년까지 성경 연구에 있어 가장 유명한 학자의 한 사람인 제롬(약 348-420년) 이 로마에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를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니안에게 영향력을 끼친 주요한 인물은 뚜르의 마르땡(St.Martin of Tours)이었을 것이다 니니안은 마르땡과 함께 프랑스에서 얼마동안 살면서 활동하였다. 니니안은 그의 일생의 과업(his life-work)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마르땡에게서 배웠다. 니니안은 지도자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최남단에 있는 휘돈(Whithorn)에서 정착했다. 니니안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니니안의 활동은 약30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니니안은 432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아일랜드로부터 학생들이 니니안이 세운 수도원으로 왔으며, 그들은 돌아가서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2) 성 콜롬바(St. Columba, 521-597)
스코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영향은 성 콜럼바의 이야기로부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대수도원장과 선교사가 된 콜롬바(Columba, 521-597)는 스코트족의 땅인 아일랜드의 도네갈(Donegal)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성직자가 된 후, 그는 여러 지역에서 설교하였고, 데리(Derry)와 더로우(Durrow)같은 지역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는 일에 협력하였다.
563년 그는 아일랜드를 떠나 '그리스도를 위해' 순례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12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콜럼바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이오나(Iona)섬으로 항해하였다. 그가 이오나에 세운 수도원은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기독교와 켈트 수도원을 전파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켈트 교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콜럼바의 주요한 초기 생애(Life of Colomba)는 이오나 수도원의 제9대 수도원장 아담난(Adamnan)에 의해 688-692년 경에 저술되었다
현재는 콜럼바가 세운 수도원에 대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오늘날 방문할 수 있는 대성당과 파편물들은 후기 시대에 속한다. 수도사들은 분리된 방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손님들을 위해서는 접견실이 있었다. 수도사들의 의복은 모직으로 된 속옷과 겉옷 등이 있었다.
콜럼바는 일생동안 종교적 실천(religious practice)에 헌신한 깊은 경건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낭랑하고 힘있는(sweet and powerful)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그는 스코틀랜드의 사도라고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597년 콜럼바는 이오나섬에서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나는 6세기 스코틀랜드 복음화 운동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라토렛 교수에 의하면, 잉글랜드를 위한 선교운동이 로마의 선교운동보다 한 세대 후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민 개종에 더 중요한 영향를 미쳤다.
콜럼바에 의해 대표되는 켈트 교회(the Celtic Church)는 약 150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야만인들의 침입의 물결은 로마로부터 브리튼(Britain, 영국, 즉 잉글랜드,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과 아일랜드의 기독교를 거의 완전히 단절시킬 정도로 대륙을 가로질러 휩쓸었다.
(3) 어거스틴 대주교
교황 그레고리 대제(590-604)는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어거스틴(약 604년에 죽음)을 파견하여, 영국에 정착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 캔테베리의 최초의 대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영국의 사도'(Apostle of the English)로 알려졌다. 그는 597년 켄트(Kent)에 도착했다. 어거스틴은 켈트 교회(Celtic Church)에 관심을 가졌다. 즉 그는 로마의 선교 방식이나 교회 관습과 다른 켈트 교회의 선교 자세 및 관습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역사가 베더(Bede)는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를 연합시키고자 했던 어거스틴의 시도가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 문제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① 켈트 교회로 하여금 로마 교회가 부활절을 맞이하는 방법을 채택하도록 요구한 점.
② 켈트 교회로 하여금 세례의 로마 교회적 전통을 채택하게 한 점.
③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는 로마 교회의 선교에 켈트 교회가 참여하도록 요구한 점.
어거스틴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로마교회 성직자였다. 매우 양심적이고 경건했으나 그는 외교적 수완과 상상력이 부족했다. 어거스틴은 교황에게 많은 문제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역의 풍습이 잉글랜드의 교회에 채택될 수 있다는 교황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켄터베리(Canterbury)는 작은 로마가 되었고, 대성당과 수도원과 학교를 거느렸다.
남 아일랜드는 주후 630년경에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잉글랜드는 664년 휘트비 종교회의에서, 북 아일랜드는 703년에,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718년경에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4) 마가레트 왕비(Queen Margaret, 1045-1093)
스코틀랜드 교회가 세계의 나머지 교회들과 완전한 일치를 가져온 것은 마가레트 왕비(Queen Margaret, 약 1045-1093)와 그의 가족이 통치하던 때였다.
마가레트는 노르만족의 침입때문에 스코틀랜드 왕실에 피난했고, 거기서 말콤3세(Malcolm Ⅲ, 1057-93)의 부인이 되었다. 말콤은 그 유명한 찬탈자 멕베드(Macbeth)를 격파하면서 1057년에 왕이 되었다.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북쪽과 동쪽에 있는 섬들을 제외한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이다. 말콤은 노련한 군인이었으나, 그의 인격은 아내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마가레트는 스코트랜드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하고 기억할만한 인물로 남아있다. 그녀는 강한 종교적 열정과 의무에 대한 충성된 헌신 그리고 특별한 인격의 힘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라틴어로 된 교부들의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성경과 교회 그리고 신자들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에 있어서 헌신적이었다.
당시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마가레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무슨 말인가! 죄인이 그 거룩한 신비(Holy Mystery, 즉 성찬)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도 죄에서 깨끗하지 못하니( no one is Pure From sin) 아무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만일 그 누구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면 주께서 왜 복음서에서 이 선포를 하셨는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마가레트는 1093년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죽었다. 그녀의 남편과 장남도 같은 해에 잉글랜드 사람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그녀의 아들들(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1세)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외국의 교회와 근접시키려는 어머니의 노력을 계속했다.
때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부당한 간섭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320년에 4명의 스코틀랜드 주교들이 교황 앞으로 출두하도록 소환되었으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조용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대륙과 계속하여 접촉을 했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외국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을 넓혔다. 15세기에는 좋은 학교들도 서립되었다. 성 앤드류 대학은 1411년에, 글래스고우 대학은 1451년에, 애버딘 대학은 1494년에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의 노선을 따라서 설립되었다.
중세 후기에 사람들은 교회 내의 타락에 대하여 좀 더 민감해져 가고 있었다. 교육과 학문 그리고 개인적인 사상들도 진전되었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성경의 원어(히브리어,헬라어)도 다시 한번 검토되었다. 인쇄술의 발견은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신기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더 실제적이고 내적이며 개인적인 종교에 대해 갈망하게 되었다. 자국어로 된 성경의 출현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
(1)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첫번째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의 재능있는 젊은이(a talented youth)였다. 그는 파리와 루뱅(Louvain)에서 공부했고, 후에는 독일의 개혁된 대학인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27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시작했다. 1528년 2월 29일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루터적 단계(the Lutheran stage of the Reformation)의 대표자였다.
(2)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
16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왕권이 약한 반면에 귀족들의 세력이 거세었다. 교회는 국토의 반을 차지하여 비교적 부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 재산은 평신도 귀족들의 소유였다. 여러 대학들이 있었으나, 교육 수준은 대륙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1543년 국회는 성경 읽기와 번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1544년에 이르러 비이튼(David Beaton, c. 1494-1546)과 친불파는 강한 억압책을 적용하였다.
이 때에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가 활동하고 있었다. 위샤트는 애버딘 대학에서 문학석사(M.A.) 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교장으로 일했다.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자로 소환되기도 했다(아마 그 이유는 그가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가르쳤기 때문이었을것이다). 그는 피신했으나 1년 안에 브리스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무렵(1540년 경)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 갔으며, 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의 진전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소코틀랜드로 귀국한 후 던디(Dundee)와 그밖의 지역에서 설교했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으며 긴 수염을 가졌다. 태도는 정중했으며 생활방식은 단순했다. 그는 매우 진지한 교사였다. 그는 추기경 비이튼의 명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 비이튼 자신은 그후 3개월 후에 성 앤드류스 성에서 매복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다.
(3) 메리 여왕과 죤 낙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61년 8월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이미 그녀는 낙스(Knox)가 자기 최대의 적이며 또 스코틀랜드가 이 양편을 함께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스는 처음엔 이 메리 여왕이 프로테스탄트 손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었고 곧 그와 비슷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낙스가 메리 여왕을 세 번 째까지 알현할 때는 정중한 만남 속에서 작은 논쟁만을 벌였었다. 그러나 네 번째 알현에서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조가 보였다.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할까 생각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낙스는 자기의 명령을 발하여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강렬한 반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메리 여왕은 국사에 한 이단적인 설교자(낙스)와 일반 평민들이 개입을 한다고 격분하여 낙스를 소환하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를 꾸짖고 또 낙스를 반역죄인이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세력은 기울었고, 1567년 메리 여왕은 몰락, 퇴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낙스의 오랜 친구인 모레이(Moray)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섭정 제임스는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파와 섭정 지지파 사이의 투쟁 속에 빠져들어 갔다.
낙스는 이 소용돌이 속에 걱정과 근심을 하며 개입하였다. 그러나 낙스의 힘은 기진한 상태에 있었다. 낙스는 임종의 자리에서 교회 직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 그 비판받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단지 그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을 참으로 증오하고 혐오한 것인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기꺼이 은혜를 베푸시사 그의 신비스런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과연 그가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너무도 컸기에 전혀 인간들의 눈치를 살핌이 없이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대로 너무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낙스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감히 고백하나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 점이 없으며,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한 점도 없으며, 나 개인의 정욕 혹은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노력하였을 뿐이다."
또한 낙스는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언에 기록하였다 :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
<대영백과 사전>에서는 죤 낙스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
"낙스가 설교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은 그가 이성과 감정을 잘 혼용하는 능력(his capacity to fuse reason with emotion)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 그가 강단에서 열정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지성과 감정에 똑같이 강력한 호소를 하였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그는 비관용적인(intolerant) 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 나 비슷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낙스의 칼빈주의는 후대의 칼빈주의보다는 훨씬 온건한 것이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오직 한마음을 가지고 일생 내내 꿋꿋하게 헌신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이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드물었는데, 그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낙스의 도덕적 생활이 그의 엄격한 시조(rigorous creed)와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 낙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가 있다."
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다. 제임스 멜빌(James Melville)은 낙스를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선지자이자 사도"(that most notable prophet and apostle of our nation)라고 불렀다. 섭정 모튼(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그의 일생동안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Here lieth a man who in his life never feared the face of man).
(4)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낙스가 사망한 후, 곧 앤드류 멜빌이 지도자가 되었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Montrose) 부근의 밸도비에서 1545년 8월 1일 출생하였다. 몬트로즈에서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고, 1559년 성 앤드류 대학교의 성 메리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1564년 가을에 파리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성 앤드류 대학교를 떠날 당시, 그는 "영국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시인인 동시에 헬라어 학자"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멜빌은 파리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철학 등을 공부했다. 후에 그는 제네바를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곧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멜빌은 베자의 문하에서 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74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노력과 열의로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어 강의실들이 꽉 들어차게 되었다. 1575년 8월의 총회에서 멜빌은 고위 성직제도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578년 4월부터 그는 <제 2 치리서> 작성을 주도하였으며, 이것은 1581년 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제 2 치리서>는 멜빌의 주요한 노력의 결과였다.
3. 죤 낙스의 활동(사역)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인공은 죤 낙스(John Knox, 1513-1572)였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그를 "그의 조국과 세계가 빚을 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인"(the one Scotchman to whom his country and the world owe a debt)이라고 불렀다.
죤 낙스는 제임스 5세의 초기인 1513년(혹은 1515년)경에 해딩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계급 출신으로서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샤트가 설교할 때 검을 들고 그를 호위하기도 했다.
위샤트가 화형을 당한 후, 낙스는 성 앤드류 성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설교의 효과는 놀랄 정도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Others cut the branches of the Papacy, but he strikes at the roots.)라고 했다.
그후 프랑스의 공격으로 성 앤드류 성은 함락 당하고 낙스는 체포되어, 프랑스 노예선(죄수나 노예들이 노를 젓게 한 돛배)에서 19개월 동안 죄수로 지냈다. 그 배에서 복역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성 앤드류 성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았으며, 그 때에 그는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나은 시기에(in better times) 그 곳에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석방된 후, 낙스는 잉글랜드의 버위크(Berwich)에서 여러 해 동안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했다. 당시에 영국 왕은 에드워드 6세(1537-1553)였으며,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지도아래 종교개혁이 급도속로 진전되고 있엇다.
낙스는 5년 동안(1549-54) 비위크에서는 목회를 통해, 런던에서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의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버위크에서 목회할 때 그는 성찬 참석자들로 하여금 성탄 식당에 둘러앉게 했는데 그는 그것이 성경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꿇어앉는 것에 대한 낙스의 반대 때문에 크랜머는 제2차 기도집(the Second Prayer Book)에서 꿇어 앉는 것에 관해 극히 개신교적 설명을 가했다. 즉, 성찬식이 시행될 때 무릎 꿇는 것은 시행되지만, 이것은 경배의 의미는 없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삽입하였다(이것은 낙스의 공헌으로 인정된다). 비록 낙스가 <제2차 기도집>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치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행정 장관(magistrate)의 명령때문에 버위크의 옛 회중에게 그 기도집의 사용을 추천하였다.
1553년 메리(Mary Tudor, 1516-1558)는 그녀의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를 계승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여왕은 완고하고 편협한 카톨릭교도였다. 메리의 통치가 시작된 몇달 뒤 낙스는 도망을 쳤고 그후 곧 프랑크푸르트의 영국 유랑민들 사이에 나타났다. 1554년 낙스는 영국 피난민 교회의 목사직을 수락했다.
후에 낙스는 제네바에 있는 영국 유랑민들의 교회에서 목사가 되었다. 1555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는 여러 지역에서 표출되는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때문에 대단히 놀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9개월 동안 아주 담대히 설교했다.
1559년 5월, 낙스는 고국의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이 시기까지 그는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의 개혁자들과 유익한 접촉을 하였다. 본래 낙스의 입장은 위샤트와 같이 쯔빙글리 적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칼빈과의 접촉을 통해 대부분의 면에서 칼빈주의적이 되었다. 낙스에게는 <제네바> 도시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학교'로 보였다.
고국에 돌아온 낙스는 성 앤드류스 성당에서 설교함으로써(1559년 6월 11일) 자기가 프랑스 노예선에서 품었던 소망을 성취시켰다. 낙스는 복음적인 기독교신앙의 확립을 위해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다.
1560년 체결된 버위크 조약(the Treaty of Berwick, 1560년 2월)에서 개혁가들은 스코틀랜드에 진주해 있었던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보호하에 두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섭정 역할을 했던 귀즈의 메리(Mary of Guise)는 관점과 야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프랑스적이었다. 섭정은 총명했으나 신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개신교도들이 거의 그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귀족들은 섭정에게 신앙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고 프랑스 군대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병이 들었고 개혁파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부르면서 이제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 양편이 다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1560년 6월 11일 그녀가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개신교 목사 죤 윌록(John Willock)이었다.
속수무책의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지원도 없고 군대의 증강 가능성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1560년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the Treaty of Edinburgh)에 따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모두 퇴각하게 되었다. 7월 15일에 프랑스가 자기 나라로 출항했고 영국군도 도보로 출발했다. 19일에 낙스는 많은 교인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승리한 스코틀랜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왜나하면 스코틀랜드에는 모든 일을 처리할 중앙집권적 권력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8월에 자체적으로 모인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이 스코틀랜드의 정식 신앙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문서는 그 색조가 온건한 칼빈주의였다(a document moderately Calvinistic in tone). 또한 이 문서는 칼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성례전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었다.
개혁교회의 조직과 그 치리체제를 정립하는 문제는 계속 남았다. 낙스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교회인사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제 1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하였다(1560년). 거기에는 개혁교회의 조직과 재정문제에 대한 제안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예배는 <낙스의 전례서>(Book of Common Order)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낙스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을 개정한 것이었다. 이 <전례서>에 의하면, 교회 회중은 그들이 매년 선출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또 이 장로들은 회중들 가운데에서 확고한 도덕적 규율(firm moral discipline)을 유지하는 데에 목사를 돕게 되어 있었다. 목사는 회중들에 의해 선출되지만 목사들은 다른 동역자들에 의해 그 신앙과 생활을 엄격하게 심사받고 통과된 후에야만(after rigorous examination of life and doctrine by their ministerial brethren)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유능한 목사가 있으면 그는 어떤 한 지역(주로 과거의 카톨릭 교구와 일치함)을 담당하는 <감독자>(superintendents)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최종적인 권위(final authority)는 장로들과 목사들로 구성된 전체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에 속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시편 찬송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개혁교회의 표지였다. 제네바에 있던 낙스의 교회에서는 51개의 시편 모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총회는 1564년에 전 시편의 완성과 출판을 제시했다. 제네바의 곡조가 평이 좋았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주 그 노래에 화음을 붙여 찬송했다. 그리하여 곧 4부로 된 찬송이 편집되었다. 가사들은 시적인 감각(poetic quality)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후의 다양한 번역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제2차 스코틀랜드 시편집(the second Scottish Psalter)이 1650년에 출판되었다.
낙스의 저술과 그가 끼친 영향력은 사람들에 의해 종교적인 면에서 또 정치적인 면에서 여러 갈래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반드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낙스가 가졌던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신념 위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세워졌다.
낙스는 <하나님의 나팔>이었으나, 후대에 남아있는 설교는 단 두 편 밖에 없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시험"(마 4:1)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의 근원과 한계"(사 26:13-16)이다.
4.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560년 8월 낙스의 지도아래 스코틀랜드의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을 폐기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백여년 이상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의 운명은 스튜어트가(家)의 왕들이 교회를 성공회 제도로 만들려는 결의 때문에 성쇠를 거듭하였다. 왕권이 지배적일 때는 성공회 제도를 지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으며(1584년), 다시 교회가 권력을 잡으면 장로제가 실시되었다(1592년).
왕정복고(Restoration, 1660-1688) 이후 성공회 제도가 재수립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이 성공회파와 장로회파 간에는 보다 더 치열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혁명에 의해 스코틀랜드 교회는 다시 장로제로 환원되어 그 이후로 계속 장로제가 실시되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나라로 병합되었고, 따라서 <대영제국>(Great Britain)이 탄생하였다. 18세기 초반의 장로제 주장자들(the Presbyterians)은 17세기 후반의 주장자들보다 더 청교도적(Puritan)이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예배를 감독주의자들(the Episcopalians)의 예배와 명백하게 구별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떠한 형식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인쇄된 의식서(printed liturgy)의 사용을 멀리하였다.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존 낙스와 스포티스우드(Spottiswood), 윌로크(Willock), 로우(Row), 더그라스(Douglas), 위남(Winarm) 이 여섯 사람을 시켜 스콜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채용하고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2) 제1회 장로교회 총회와 훈련교서.
1560년 12월 20일 스코틀랜드의 제1회 장로교회 총회가 낙스의 지도아래 개최되었는데, 출석자는 목사 6명, 치리장로 36명이었다. 이 총회는 훈련 교서(Book of Discipline, "스코틀랜드 교회정치 체제""첫번째 훈련교서")를 만들어 냈다.
이 훈련 교서에는 장로, 집사의 임기는 1년으로 하였고, 당회, 대회, 총회의 조직을 정하였으며, 교회 직분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주일학교 부장, 대독자(Readers) 등을 두게 했으며, 기독교교육에 관한 규정을 많이 할애 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태도, 도덕적인 문제를 취급하여 신앙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한 것을 본다.
3) 멜빌과 제2훈련교서
존 낙스가 죽은 후 앤드류 멜빌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사실상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든 정체(政體)를 정립한 사람이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발전시킨 사람이다. 오래된 훈련 교서를 멜빌은 1578년 제2훈련교서로 개정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1년 총회에서 채택되고, 칙령으로 선포되었다. 이 교서가 바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철저한 장로교회로 만든 것이다. 이 교서는 시정과 교회정치를 분리했으며, 교회 정치는 교리, 훈련, 성찬 등 3부분으로 구분했고, 교회 공직을 목사(감독), 장로, 집사로 구분하였고, 네 번째는 박사와 교사를 덧붙혀 놓았다.
(4) 국민 서약(National Covenant)
제임스 6세는 1603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어 제임스 1세라 불리어 졌는데 이때 양국은 동일한 군주 아래로 통일되었다.
이 제임스 1세가 162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구교의 정치 형태와 예배방식으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챨스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교회는 1637년 7월 23일을 기해서 영국 구교회의 예배 형식을 채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 에딘버러의 존 낙스의 옛 교회인 성 길스 교회에서 대사제 로드의 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자마자 부인 노동자 제니 게디스(Jenney Geddes)가 의자를 수석 사제의 머리에 던졌기에 한 순간에 민중은 대 소동이 일어났고 여러 물건을 퇴장하는 사제에게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여 1638년 3월 1일에 귀족, 신사, 목사, 농민 등의 수많은 장로주의자 회중이 그리프리알(Greyfriar)교회 뜰에 모여 "국민 서약"에 서명을 하고, 생명을 걸고 서로 도와 주며 장로주의 신앙에 충성할 것을 서약했다.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널리 퍼져 전 스코틀랜드의 사람들이 서명하였다.
그리하여 1638년 11월 21일 글레스고우에서 총회가 모여 알렉산더 헨더슨이 의장으로 뽑혔다, 그는 왕의 특사와 외교를 벌여 감독제도는 추방하고, 순수 장로회 주의를 안드레 멜빌레가 고안한 대로 회복시켰다.
(5) 계약자들(The Covenanters)
1660년 11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공화 정치를 했던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델란드에 망명해 있던 챨스 왕자를 맞아 들여 국민 서약에 서명시킨 다음 찰스2세 왕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얼마 안 있어 국민 서약을 파기하고 장로회주의를 조소하고, 엄격한 법률을 재정하여 영국 국교회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단속하였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인들은 다시 국민서약 아래 단결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계약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챨스 2세 때 이들이 받은 고난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수한 남녀, 어린이들까지 신앙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인 시대(Killing time)"라 일컫고 있다.
(6) 혁명과 종교 관용령
1685년, 찰스 2세가 죽은 후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으나 1688년에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이때 이른바 명예혁명(Glorius Revolution)이 일어나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네델란드 사람으로서 "침묵의 윌리엄"의 자손이고, 장로회 주의자였다.
1689년에는 관용령(Toleration Act) 이 의회를 통과해서 역사상 없었던 종교의 자유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주어졌다. 1690년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가교회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712년에 "성직 추천령"이 의회를 통과하였는데, 이 법은 소수의 재산 소유자에게 목사를 임명하는 권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130년에 걸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이 되었다.
(7)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최초의 분열은 1733년 에벤저 어스킨(Ebenezer Erskine)의 지도에 의해 일어났다. 성직 추천령에 항의하여 동료 목사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를 나와 협동노회(Associate Presbytery)를 만들었고, 이 새 교회는 100년 간에 걸쳐 몇 교회로 분열을 해 나갔다.
1752년에는 토마스 기레스피(thomass Gillespie)가 성직 추천령에 의해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 대회"(Relief Synod)를 만들었다.
1843년에는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성직 추천령에 반대해서 472명의 목사와 하께 이탈해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대분열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교회원이 선거에 의해 제직(목사, 장로, 집사)을 선출해야 한다는 교회 자립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자유 교회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유력하고 유능한 영적인 목사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1874년 의회는 성직 추천령을 폐기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자치의 힘을 회복하였다.
(8) 합동과 재 합동
1847년 토마스 기레스피의 지도로 만들어진 구원대회와 협동노회로부터 이탈했던 사람들이 합동해서 "합동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만들었다. 이 교회는 훌륭한 교회로 성장했고, 뛰어난 목사들을 배출시켰다. 1900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합동 장로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합동자유교회"를 만들었는데 회원은 50만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한 자유교회의 25명의 목사들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라는 이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1929년에 스코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 합동자유 교회가 합병하여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어 대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하여 계속 자기 교회이름을 유지하는 교회들도 있다.
아무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세계 장로교회의 체제와 교리에 모판임을 사가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643년 7월부터 1648년 2월까지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참석하여 장로교회의 정치와 교리의 요람이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기타 원칙들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물론 이 교리의 사상들은 칼빈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스코틀랜드장로교회가 직접적으로 적용했고, 세계에 전하여 준 것이다. 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줄기교회요, 세계 모든 장로교회는 그 가지와 같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