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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aly/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제자도_탐 샤인

시편에 저주하는 기도가?

      시편은 기도의 책입니다.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시편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장 많이 인용하신 성경이 신명기와 이사야 그리고 시편이지요. 

      시편을 읽다 보면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시편이 있는가 하면 별의 별 내용을 다 기도했구나 싶을 만큼 거친 감정과 거친 말 심지어 저주의 기도까지 나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좀 당황스럽기까지 하지요.

        오늘 새벽기도를 마치고 오는 길에 한 학생이 질문을 해서 간단히 대답을 해주었는데  짧은 시간에  간단히 답해주어 아쉬웠는데  좋은 설명이 있어서 글을 하나 올립니다.

      글을 쓰신 분은 미국 워싱톤 한인교회의 김영봉 목사님이신데요 사귐의 기도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저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쉽고 분명한 글이 흔치 않은데 참 감사합니다.


      저주 시편으로 기도하기

      김영봉( 와싱톤 한인교회 담임목사 )

     

   구약의 시편을 읽다 보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시가 나옵니다. 109편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다윗의 노래’라고 이름이 붙은 이 시편에서 기도자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악담의 기도’를 퍼붓습니다.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 빚쟁이가 그 재산을 모두 가져 가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재산을 모두 약탈하게 하십시오”(8-11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유사한 기도는 시편에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언서에서도 이 같은 기도를 가끔 만납니다(렘 18:21-22).

      성경에서 이 같은 기도문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들은 당혹감을 가집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같은 기도문을 대하는 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라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롬 12:19). 이같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아주 분명합니다. 원수조차도 미워하면 안 되며, 미워하지 않는 데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축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고 또한 그렇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가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몇 가지 제안이 있었습니다.

      첫째 제안은 저주 시편을 무시하라고 합니다. 원수에게 악담을 퍼붓고 저주하는 기도는 영적으로 미숙한 시기에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드린 기도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가르침을 아는 우리로서는 무시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둘째 제안은 저주 기도를 좀더 긍정적으로 보려 합니다. 부당하고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는 기도자가 직접 복수하기를 포기하고 저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맡긴 셈이니, 나름대로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제안은 구약시대의 하나님 이해와 신약시대의 하나님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이 같은 차이가 생겼다고 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 징벌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으로 이해했지만, 신약시대에는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런 기도’가 나올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제안은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만, 더 많은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제안은 구약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듭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구약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거하자는 제안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구약은 미숙한 종교성이 만들어 낸 책이 아닙니다. 둘째 제안에도 깨끗이 해결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저주 기도를 통해 복수에의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나, 그렇다고 해도 기도에 사용된 지독하고 가혹한 저주의 말들까지 합리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 같은 악한 감정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큰 허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저주 시편을 ‘하나의 기도’로 보는 데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는데,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정직한 기도는 때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과정입니다. 저는 저의 기도생활을 통해 그리고 교우들의 기도생활을 관찰하면서 ‘정직한 기도’의 중요성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감정에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정을 속이려 한들 그분이 속기나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 앞에서 진짜 감정을 속이고 믿음 좋은 사람인 양 연극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고, 거짓 감정 뒤에 숨는 겁니다. 그 같은 기도는 아무런 변화도 만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자신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사무칠 때, 하나님 앞에서 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놓는 정직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해 보일 때, 하나님을 향하여 따지고 항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문과 의혹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하나님 앞에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관계는 피상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축적됩니다. 그것이 결국 믿음을 죽게 만듭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 중, 열세 살 난 아들을 뇌종양으로 잃은 분이 계십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 착한 아들을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나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 분노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그분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께 분노를 품고 있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친구들이 그분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면 결국 그 분노는 풀어질 것이고, 때가 되면 다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 어머니가 하나님 앞으로 나와 분노를 토해 내신다면 더 좋겠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그렇게 하실 줄 알기 때문에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둘째, 저주 기도를 ‘하나의 기도’로 본다는 말은 그것이 ‘기도의 과정’의 한 지점에서 드려진 기도였음을 고려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09편의 기도는 다윗이 기도생활 중의 한 지점에서 드린 것입니다. 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사무칠 때 하나님 앞에 토로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이 드린 기도의 전부가 아니었으며, 최종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점차 마음을 지배하던 악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기도는 내면의 감정을 순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원한과 증오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입을 열자마자 쓰디쓴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고 나면 격한 감정이 가라앉고 차츰 하나님 앞에서 냉정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구해야 옳은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한 번의 기도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같은 문제를 두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진실하게 기도하면, 기도의 색깔과 톤이 점차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동일한 내용의 기도 제목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죽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실하게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고 그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원한의 감정이 사무치는데 입으로만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는 가식이요 허위입니다. 물론, 이렇게 ‘억지기도’를 하여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신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와 축복이었습니다. 때로는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힘입어 용서하기 어려운 문제를 아주 쉽게 용서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한과 증오의 밤을 지낸 후에 비로소 진실한 용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저자나 예레미야처럼 저주 기도의 터널을 거쳐야만 용서와 사랑이라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109편의 기도를 드린 다윗이 며칠 혹은 몇 주일 후에 다음과 비슷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얼마 전에 제가 쏟아 놓은 악담들을 기억하시지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주의 은혜로 종의 마음을 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축복하소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오니, 그들을 깨우쳐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김영봉/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