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원배 (芮元培)
Albert C. Wright, 1880-1971
라이트 선교사(예원배)는 조용하고도 사려 깊은 성격, 자상한 인품,
그리고 한국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뉴질랜드 오타고(Otago)에서 1880년 3월 3일 출생했다.
그는 오타고 대학(Otago University)을 졸업한 그는 신학교육을 받기로 작정하고
더니든(Dunedin)에 있는 녹스신학교(Knox College)에 진학하였다.
신학교육을 마친 그는 노회로부터 강도사 인허를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뉴질랜드장로교회는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 선교사가 되고자 했던 라이트는 호주로 이주하였다.
호주로 이거한 그는 1912년 9월 9일 목사안수를 받은 후
그는 1912년 9월 25일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12년 내한하여 1942년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30년간의 예원배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교회를 순회하고 지역 교회를 돕는 일이었다.
그가 한국의 마산(1912-1924), 진주(1924-1928),
부산지방(1928-1942)에서 봉사하는 동안 그는 늘 지역교회를 순회하였고
이 지역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도 크게 봉사하였다.
부산의 해운대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가
예목사의 선교 25년을 기념하여 설립하기로 결정하여 세웠고
설립 이듬해인 1938년 6월 제41회 경남노회가 이곳서 모여
일제하의 기념비적 신사참배 거부결의를 하였다.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하자 많은 선교사들이 귀국했지만
예목사 부부는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강제 연금 및 출국을 당한 분이다.
1942년 11월 신사참배에 대해 반대의사를 주장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철수시키려는
일본제국의 압력 때문에 예원배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30년의 사역을 마감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1971년 7월 7일 9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장례식에서 한국에서 함께 일한 조지 앤더슨 선교사가
그의 한국 사랑을 읽게 하는 인상 깊은 조사(弔詞)를 바쳤다.
나는 그처럼 쉬운 한국어로 한국인과 편안하게 대화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설교에서도 쉬운 말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끝임 없는 순행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지역 교회순회는 그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작은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
그는 교인 한 사람 한 泳殆“ 일일이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남을 섬기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그를 ‘사랑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2010.3.11.교회복음신문/허진화 기자)
*특이한 것은 그는 경남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가졌던 인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