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선교운동사
제 10 강 Charles Simeon과 Cambridge Movement
김 요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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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영국의 사회상과 대학상황
- 영국 대학생선교운동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 -
18세기 산업혁명을 전후하여 일어난 복음주의학생운동의 원형이 Wesley 형제를 중심한 Holy Club 운동이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에는 또하나의 복음적인 학생운동이 탄생하였다. 그 원형이 Charles Simeon을 조상으로 Cambridge 내에서 일어난 대학생선교운동이다.
19세기는 영국이 세계인구와 지구표면의 1/4을 차지하여 해가 떨어지지 않는 나라라고 부를 만큼 세계를 재패했던 대영제국 시대이다. 산업혁명의 성공이후 작은 섬나라 영국의 세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대국이면서 인도, 캐나다, 오스트렐리아, 남아 연방 등 5대양 육대주에 막대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세계를 리드하던 소위 “영국의 시대”(The Age of Anglo-Saxon)를 구가하던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이 시대는 소위 Victoria의 중산계급 시대였다. Victoria 여왕은 1819년에 태어나서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에서 최장기 집권아래 제국의 번영기를 이루었고 특히 1805년 Trafalgar 해전 이래로부터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 함대를 꺾은 이후 바다의 패권을 확고하게 잡게 되었고, 식민지 확장과 함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 가운데 대영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성공적인 발전과 함께 세계의 부가 영국으로 몰려왔다. 인도의 목화, 오스트렐리아의 양모와 남아연방의 금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각 식민지로부터 목재와 석탄과 철광석 그리고 값싼 노동력과 세계 식민지의 광대한 시장 등 대영제국은 곧 거대한 시장이자 자원공급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London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요, 영국은 부강한 자본주의 나라가 되었다. 즉 그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자유무역과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번성의 진정한 기반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부의 축적은 자연히 물질주의와 향락주의가 국가 내에 팽배하게 되었고 빈부의 차이가 야기되었다. 반면에 1760년대부터 일어난 산업혁명의 여파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평온했던 농촌과 도시는 급격한 인구의 대이동과 변화를 가져왔고 인구의 도시 집중은 또 다른 사회문제인 도시 빈민층을 탄생시켰고 노동과 고용, 질병과 환경, 및 주거문제 등 산업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파생하게 된 여러 문제를 야기 시켰다.
또한 사상적으로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18세기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전 유럽을 휩쓸었다. 계몽사상은 합리적 비판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와 정치 그리고 종교적 전통이나 인습을 타파하였다. 그리고 종교사회로부터 벗어나 이성적 합리적 사회건설을 위한 세속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들은 전통적 기독교를 부인하였고 기독교의 dogma를 배격하고 철저한 이성과 합리주의적 지식이 중요 진리가 되었다.
영국 역시 이 시대는 하나님 대신 인간이성을 신봉하였다. 또한 학문은 완전히 실증주의적 방향으로 흘렀고 사회전반의 개혁을 요구하는 변혁의 시대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대학가 역시 새로운 사상적, 학문적 분위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50년부터 75년에 이르는 19세기 중반이후에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학문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대학분위기는 불신앙으로 가득 찼고 대학교회는 완전히 그 권위와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챨스 다윈의 진화론과 Charles Lyell의 지질학 원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관념을 철저히 부정하고 객관화된 순수한 인간성과 Human being(인간존재)를 강조한 포이엘 바하(1805-72)를 중심한 새로운 종교철학, 칼 마르크스(1818-83)의 변증법적 유물사상(Dialectical Materialism)이 가져온 인간정신의 물질화, 니체의 실존사상(1844-1900), Auguste Comte(1798-1857)의 실증주의(Positivism), John Stuart Mill(1806-73)의 공리주의, William James(1842-1910)의 Pragmatism(실용주의) 등 19세기는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사상적 지적변혁의 홍수를 이루었다. 그 외에도 역사와 언어학 고고학 발견과 언어 분석 등은 종래의 신앙과 성서를 의심케 하였고 대학 내에 전혀 새로운 영적분위기를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지적변화와 캠퍼스 분위기에서 대학 내 지성인들에게는 종교란 매력이 점점 없어져갔다. 그리고 신앙의 회의와 더불어 세속주의 물결이 캠퍼스를 뒤덮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승마, Boat race, 크리켓 등 스포츠와 오락이 최고 인기를 끌었고 물질주의와 안일주의가 캠퍼스를 급격히 세속화시켰다. 그리고 교회는 Minority로 점점 전락하거나 형식화 되어갔고 신앙은 더 이상 국가적 국민적 생활과 지성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19세기 영국의 대학 내, 영적 위기 속에서 일어난 운동이 캠브리지 대학 내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다.
Ⅱ. Charles Simeon(1759-1836)의 성장기와 회심의 체험
Charles Simeon(1759-1836)은 영국 Cambridge 대학에서 일어난 대학생선교운동의 믿음의 조상에 해당한다. 그는 1759년 9월 24일 Reading에서 아버지 Richard Simeon과 어머니 Elizabeth Hutton 사이에서 막내이자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비교적 부유했고 그는 태어 난지 한 달 만에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소년기는 영국의 고등학교 명문인 Eton에서 보냈다. 그리고 19세의 나이에 Cambridge의 Kings College의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생기발랄한 소년기를 보내었고, 승마는 그가 좋아하는 운동이었다. 그의 성격은 매우 양심적이었고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이었다. 반면에 그는 믿으려고 애를 썼으나 자의식과 죄의식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자기 정죄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내면의 공허와 자기존재의 중요성 사이에서 자기 생명의 갈등과 시련을 겪어야만했다. 그는 이 무거운 죄 짐을 벗으려고 노력을 하였다.
대학 입학이 가까워오는 1779년 1월 29일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이 그에게 곧 다가왔다. 그가 대학입학 첫 학기 성만찬까지는 약 3주간의 여유가 있을 때 「인간의 전적 의무(Whole Duty of Man)」라는 오래된 종교서적을 열심히 읽으면서 금식과 기도를 병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 간구했다. 그런 가운데 오직 한 가지,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 임하길 소원했다. 또한 부활 주간이 되었을 때는 Wilson 주교가 쓴 「The Lord's supper (주님의 성만찬)」에 관한 책을 읽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희생제물의 머리에 전가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생각은 곧 그의 마음에 깊이 들어왔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들을 예수님의 거룩한 머리에 내려놓으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희망이 수목금요일을 보내면서 점점 강한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4월 4일 부활절 아침, 시므온의 마음과 입술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부활하셨다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면서 그 순간부터 그의 영혼에 평화가 넘쳐나며 회심과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다.
거듭나기 전에 깊은 죄의식에 빠졌던 그는 “개는 죽을 수 있으나 자기는 지난날의 죄 때문에 영원히 죽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개가 부러워서 자주 쳐다보았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를 대신하여 찢기신 예수님의 몸과 흘리신 피가 자신을 구원하였다는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부활절 아침에 하였으니 그의 대학생활이 얼마나 축복되었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장차 영국과 세계의 지성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캠퍼스 복음운동을 위하여 한 사람 Charles Simeon을 예비하였던 것이다.
Ⅲ. Charles Simeon의 아름다운 생애와 감동스러운 영향력
Charles Simeon은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후 자기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한 것은 주일날 거의 교회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하인과 그리고 다른 여러 하인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좋은 책들을 읽어주거나 기도문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거저 받았으므로 그들 역시 영혼의 축복을 거저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은혜는 긴 방학 동안에 8살 위의 형과 가족들과 집안하인들과 함께 나누었다. 또한 이웃들과도 나누었다. 또 열심히 Harvey's 거작들과 Sharpe's 대주교의 책을 읽는 가운데 진리란 이해(골2:2)와 믿음(히10:22)과 소망(히6:11)의 충만함에 이르게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Kings College에서 학문을 닦는 동안에 자기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은혜를 나누어주려고 애를 썼다. 또한 부유한 명문집안 출신 캠브리지 학우들이 방탕가운데 많은 물질을 낭비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매우 검소하게 절약하며 살았다. 또한 학창생활 동안 자신의 생각과 행동 등을 꾸준히 일기에 기록했다. 이와 같이 그는 대학시절 그의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는 신앙과 학문 면에서 매우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남을 위한 그의 아름다운 일생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약관 23세의 나이에 1782년 5월 26일 Ely 감독에서 목사로 안수 받으면서 St. Edward에 있는 Holy Trinity 교회의 교구목사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동시에 King's College의 종신 Fellow(특별 연구원)로 위촉받아 계속 대학에 남게 되었다.
바로 이 순간부터 54년간 결혼도 하지 않고 역사상 캠브리지 대학생 복음운동과 영국 국교회와 영국사회 중산층에 큰 영향을 끼치는 그의 위대한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지난날 대학생활 시작에서 경험했던 그 영적 위기 때문에 이 54년 동안 Cambridge 대학 중심에 자리 잡은 Holy Trinity 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캠브리지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Charles Simeon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사역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난다.
(ⅰ) 강의와 설교(The Lecture)
이것은 주일 저녁에 행하여지는데, 성경을 읽은 후 강해 설교와 복음적인 기독교에 관한 강의가 전해졌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학생들이 Charles Simeon처럼 회심을 체험하고 변화되었고, 바른 대학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배척을 동시에 받아야했다. 그래서 반대파들은 악명 높고 고집 센 “Simeonism” (시메온 주의)이라고 비난했다.
(ⅱ) 학생들과의 대화(Conversation Parties)
이 모임은 King's 칼리지 기숙사 계단 맨 꼭대기에 있는 그의 큰방에서 이루어졌는데 주로 식사 후에 차를 마시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일명 “open tea-parties”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학생들이 평소에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신앙과 학문에 관한 의문이나 알고 싶은 주제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참석한 청중들이 그때그때 선택한 Topic 등 적절한 주제들에 관하여 그의 담화와 강화 등의 대답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부담 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누구나 그 토론에 끼어 들 수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가 전체를 지배해 버리거나 제한하지 않는 자유토론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신앙의 주제에 대한 인격적인 대화이다. 또 이런 자유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곧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관심사와 고민을 함께 생각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상하 복종관계나 강압적으로 획일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생각하는 우수한 인재들 곧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곧 인재산실인 Oxbridge 교육의 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
(ⅲ) 강해 학교(Sermon Parties)
이것은 주일날 그의 설교에 참여한 자들에 행한 것처럼 주로 일생 목회에 헌신할 목사 후보들을 위한 강해설교 연구와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Simeon은 설교준비 방법과 기술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전체 Context 안에서 각 본문을 실제적으로 설명해 주는 Outline을 받아쓰게 한다. 물론 이것은 게으른 경향이 있는 목사후보생들에게는 그들이 장차 사용할 설교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단순히 보충하도록 하게 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진 강해 설교연구는 수백 명의 미래의 목회자들이 위대한 복음적인 진리와 교리를 충분히 흡수하게 하였고 후에 이 복음적인 진리는 전국에 씨 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 단순한 한 가지만으로도 전 영국 교회를 영적으로 재활 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강해설교는 오늘날 성경66권 전체 강해 연구 집으로 출판되어 귀한 영적 유산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Charles Simeon 이야말로 오늘날 전 세계 복음주의 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강해 설교의 진정한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Charles Simeon의 이러한 설교학교는 그의 Holy Trinity 교회 후계자인 William Carus에 의해서 좀 축소된 규모로 계승되었다. 그 결과 William Carus는 후에 Memoirs of Charles Simeon 이라는 저서에 Simeon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된 삶을 담아냈다.
또한 이 유산은 그 후 30년 후에 영국의 쟁쟁한 성경학자인 J. B. Lightfoot 와 B. F. Westcott와 F. A. Hort와 같은 인물들이 이끌었던 캠브리지 주석학파(Cambridge Exegetical School)을 탄생시켰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 뒤를 따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신약성경 헬라어 원전을 깊이 다루는 캠브리지 신학훈련의 우수한 특성을 살렸으며 소위 문법적 역사적(grammatieo-historical) 주석 원리를 그 해석의 근간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계속적으로 캠브리지 학생들에게 복음적인 전통을 계속 유지하게 하였다.
그러면 Charles 시몬의 신앙과 삶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첫째 그는 죄인들에게는 겸손으로 둘째, 구주를 향하여서는 높이 받들었고 셋째 성결(Holiness)에 대한 강조다. 그의 설교를 듣고 따르는 자들은 이것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적인 인본주의적 캠퍼스 분위기는 그에 대하여 극렬한 반대와 분노 섞인 비판을 가해왔다. 심지어 “시메온 멍청이들(Simeonite)”이라는 욕까지 하였다. 그가 1786년, 1796년, 1809년 세 차례에 걸쳐 Great St. Mary의 대학 교회에서 연속적인 설교 주간 설교를 할 때도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서 조롱하고 방해를 놓았으나 그는 그들을 잠재웠고 오히려 깊은 감동을 주었다. 1788년에는 캠브리지 시와 그 주변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기부금을 조성하여 적극적으로 구제에 힘썼다. 그의 괴팍스럽고 좀 근엄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 사람들과 대학들은 마침내 Simeon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1836년 소천 했을 때는 그 도시의 전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Cambridge 대학들의 절반이 그의 죽음에 애도와 마지막 존경을 표시했다. 또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백 수천의 젊은이들이 선교사와 목사의 일생을 살게 되었다.
그 증거는 그가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는 영국 교회 내에 복음적인 목회자는 소수에 불과했으나 그가 죽을 무렵에는 전 영국교회의 1/3을 차지하는 강단이 복음주의자들로 채워졌다. 또한 대학 내에 적극적인 신자들의 흐름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비 복음적인 영향력과 자유주의 신학적인 High-Church 성향인 Oxford Movement가 지배하게 된 Oxford 대학과 아주 대조된 원인은 곧 Charles Simeon 한 사람의 존재와 영향 때문이다. 아직도 영국국교의 형식주의가 절대적으로 대부분의 대학을 지배하는 영향아래 Cambridge 대학은 안전한 가운데 복음주의적 젊은이들이 올 수 있었다는 것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Ⅳ. Charles Simeon의 영적인 유산들과 Simeon의 후예들
Charles Simeon이 살아생전에 보여준 복음적인 영향력은 가슴이 뜨거운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때 일생동안 결혼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대학생들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친 점, 오늘날 Quiet Time과 Daily Bread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새벽 4시에 기상해서 4시간동안 그가 감당한 기도와 말씀묵상, 본문중심의 강해설교와 말씀중심의 목회,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목회와 사역들, 성서공회(Bible Society)를 통한 많은 성경을 보급하게 하는데 공헌한 점, 교회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구제운동, 또한 대학동기였던 William Wilberforce를 중심으로 전개된 The Clapham Sect의 노예해방운동 지원, 성경 66권 강해설교 전집, 그의 제자 Henry Martin이 선교사로 가게된 것을 계기로 1779년에 조직한 Church Missionary Society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 등, 대학교육과 목회와 선교활동과 사회 운동 전반에 걸쳐 직접 간접으로 개인뿐 아니라 교회와 대학과 사회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복음주의 학생운동 차원에서 그의 영적 영향력을 받고 Cambridge 대학 내의 생긴 자발적인 모임과 운동이 4개 있다. 그것은 곧 첫째, Jesus Lane Lot(패거리들) 둘째, Cambridge Prayer Union (CPU) 셋째, Cambridge University Church Missionary Union (CMU) 그리고 넷째는 Daily Prayer Meeting(DPM)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 합하여 탄생한 최초의 학생들의 캠퍼스 자발적인 복음운동인 The 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 (캠브리지 대학 간 기독인 연합체)이다. 바로 이러한 자발적인 학생들의 모임이야말로 Holy Club과 더불어 대학 내 복음주의 학생선교운동의 원형에 해당한다.
Ⅴ. 캠브리지 대학생 자발운동의 탄생과 그 실체
1. The Jesus Lane Lot (젊은 예수쟁이들)
Charles Simeon이 1836년 소천 했을 때까지 그는 어떤 학생운동을 스스로 만들거나 남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기 십년 전 1827년 어느 일요일 아침 몇몇 학생들이 Simeon이 사무하는 Holy Trinity 교회에서 오전예배를 마치고 학교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St. John's College 근처 Summer House에 잠시 앉아 쉬면서 그날의 설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다. 그 때에 James Wright라는 학생이 우리시간의 일부를 바쳐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면 어디서 봉사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Newmarket시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마을 Barnwell 마을이 좋겠다고 의논이 되었다. 그들이 이 마을을 선택한 것은 영적인 상태가 매우 취약하고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침 Barnwell마을 가까운 Jesus Lane에 있는 Society of Friends회가 소유하고 가끔 사용하는 한 홀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각 집들을 방문하여 어린이들을 초청하여 주일학교뿐 아니라 영어기초학교까지 운영하여 매우 성공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의 첫 번째 메시지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과 구원의 말씀이었고 어린이들은 영어로 읽고 쓰게 되었다.
이 주일학교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후에 이 교사들 가운데 B. F. Westcott 와 J. B. Lightfoot와 같은 위대한 성경학자들이 많이 탄생하게 되었다. 1877년 60년 기념발간 The History of Jesus Lane Sunday School(1827-1864) 개정판에는 여기에 참여했던 무려 220명의 여러 분야의 남녀 학자들이 기록될 정도였다.
이와 같이 Jesus Lane Sunday School의 출신들은 Jesus Lane Lot (젊은 예수쟁이들)라고 불릴 정도로 자발적인 Cambridge 학생들의 복음적 활동의 효시이자 장차 대학과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학생복음 활동의 산실이 되었다.
2. Cambridge Prayer Union(캠브리지 학생 기도회)
또 하나 학생중심의 자발적인 모임은 1848년 Arbert Augustus Isaacs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탄생된, Cambridge Prayer Union (CPU)이다. 이것 역시 Jesus Lane Sunday School과 관련된 가운데 파생된 자발적인 모임이다.
A. Isaacs가 Cambridge의 Corpus College에 신입생으로서 들어온 것은 1847년 1월 이었다 Corpus College 역시 Queens와 더불어 학생을 지도하는 연구원들과 학생들 사이에 복음적인 열정으로 가득한 분위기로 이미 소문나 있었다. 그 당시 대학풍토상 3학년이 신입생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눈 쌀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St. John's College의 3학년인 Frederick Gough는 대학숙소가 다른데도 Isaacs가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같은 대학 선배들보다 제일먼저 Isaacs를 찾아가 친절하게 그 도시와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리스찬 젊은이들의 활동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대학에 온 첫 주일 날에 Jesus Lane Sunday School의 교사들의 사무실로 그를 인도하였다. 두 사람의 사귐이 오래 지속된 가운데 마침내 F. Gough가 CMS 파송 중국선교사로 가야함을 알게 되었고 Gough 선배가 안수를 받고 짧은 기간의 부목사 수습기간이 끝나면 중국선교사로 가는데 항해 기간만 해도 그 당시는 6개월이 걸렸다. Isaacs의 마음에는 Gough 선배에 대하여 깊은 존경과 애정이 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영국인이 중국에서 선교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되었고 매우 험난하고 잦은 내전으로 인하여 매우 위험하였다. 그래서 Isaacs의 생각은 불확실한 미래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1847년 5월이 시작되는 어느 날 Gough과 Issacs는 서로 차를 마시면서 우리의 몫으로 던져진 세계가 어떤 부분이든지 간에 어느 곳으로 흩어져가든 기도의 영 가운데 서로 만날 필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Isaacs를 포함하여 6명의 친구들은 St. John's의 Edmund Carr Rooms에서 밤이 되기까지 기도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러한 일련의 준비과정 속에서 1848년 3월 Corpus에서 탄생한 것이 The Cambridge Union for Privite Prayer, for Members of the University Preparing for the Ministry라는 좀 긴 이름을 가진 기도회이다.
1849년에 그들은 1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 규약은 매달 둘째 월요일 아침 6-7시에나 혹은 자신이 편리한 시간에 회원들이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이다. 주로 기도내용은 국내에 있거나 국외에 있거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복음을 널리 전파할 사역자들의 증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리고 각 회원은 규칙적으로 자신의 기도제목을 총무에게 보내고 총무는 이것을 주기적으로 간행하여 모든 회원들에게 보내어서 서로 회람하며 기도하게 하였다. 이것은 20세기까지 계속되었고 또 이러한 조직 형태가 다른 기관에 적용되어 2번에 걸친 세계대전 가운데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하고 많은 회원들이 서로 서로가 기도가운데 밀접하게 접속할 수가 있었다.
1850년에는 안수 받지 않은 학생들도 이 기도회에 참여가 허용되었고 Cambridge University Prayer Union(CPU)는 처음으로 전적으로 졸업생이 아닌 재학생들로만 구성된 캠브리지의 기독학생회가 되었다. 이 회원들은 점점 증가하여 1870년에는 약 1천명이 되었다. 그래서 이 학생회는 거의 협력활동이 아닌 순전히 개인 기도를 위하여 설계된 모임이다.
3. Cambridge University Church Missionary Union(CMU)
캠브리지 기도회가 탄생한지 10년 후인 1858년 “캠브리지 대학선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미 Cambridge는 Charles Simeon이 있을 때 그의 제자인 Henry Martin을 비롯하여, Thomason, Buchanan등 여러 캠브리지 출신선배들이 영국의 최대 선교단체인 Church Missionary Society(CMS)를 통하여 선교사로 나간바 있다.
캠브리지 대학 선교회가 탄생된 근본 동기는 1857년 12월 첫 주일 Africa의 탐험가요, 개척선교사인 David Livingston이 대학에 와서 강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의 강연장에는 Barnwell의 부목사인 W. H. Monk와 그가 초청한 선교에 관심이 있는 대학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가득했다. 그 당시 리빙스턴은 44세로서 이미 16년간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고 1년전 그 유명한 Victoria 호수와 폭포를 발견하였다. 그는 캠브리지 학생들에게 Africa 탐험과 발견들, 노예들의 참상과 대륙의 상업적 가능성 등을 꾸밈없이 단순한 어조로 설명하였다.
그가 캠브리지에 온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추종자들을 부르러 온 것이다. 선교에 필요한 사람들은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견고하고 모험심이 있고 열정과 영성을 가진 자 라고 말했다. 그는 거의 한 시간가량 말하면서 청중들을 향하여 조용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나는 여러분들이 Africa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선교의 문이 열려 있지만 나는 수년 내에 그 나라에서 추방당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다시 문이 닫혀서는 안 됩니다. 나는 상업과 기독교의 길을 열기 위해 다시 Africa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내가 시작했던 이 일을 함께 실행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당신과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그 동안 리빙스턴이 이 대학을 방문하기 전에는 캠브리지 대학은 수년 동안 영국의 큰 선교단체인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과 The Church Missionary Society와 느슨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리빙스턴이 방문하기 전에는 캠브리지 사람들에게 해외 사역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8천명 가운데 선교사가 되겠다고 알려진 수는 열두 명도 안 되었다.
그러나 W. H Monk는 기도모임과 선교에 관한 문서를 읽는 모임을 자주 가져 선교 정신을 고취시키고 또한 선교사역에 종사할 후보들의 증가를 위하여 1858년 초에 Cambridge University Church Missionary Union을 조직하였다. 상당수의 상급 졸업자들과 재학생들이 이 CMU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긴 방학 동안에는 Emmanuel의 한 fellow가 그 책임을 맡아 새로운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바로 그 일에 적합한 재학생 한 명을 총무로 뽑았다. 그해 여름에 선교회 총무로 뽑힌 자가 John Barton이다. 그는 Quaker 교도출신으로 겨우 21세에 지나지 않은 Christ's College의 3학년을 시작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 2학년 때 이미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한 자였다. John Barton의 Leadership 아래 캠브리지 내에 선교의 무관심은 깨뜨려졌고 CMU 회원가운데 1859년 4월 6일의 기록에 의하면 13명의 회원들이 해외선교 사역을 위하여 힘쓸 것과 그를 위하여 서로 중보의 기도를 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대학회원이면 누구나 만일 하나님이 그를 할 수 있게 한다면 다 그 목적에 찬동과 서명한 자는 기꺼이 선교사로 가는데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 가운데 CMU는 전진하게 되었고 미래를 위하여 견고한 기초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후에 Cambridge Seven에서 시작하여 Cambridge Seven Hundreds까지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캠브리지 대학 선교의 원형이다.
4. The Daily Prayer Meeting
캠브리지 대학에서 학생 주도로 탄생한 가장 중요한 모임이 1862년에 창설된 Daily Prayer Meeting(DPM)이다. 이 DPM은 같은 고등학교 Liverpool College 출신으로서 두 일학년생 St. John's 대학에 입학한 J.F.B. Tinling과, Clare 대학에 입학한 A. Maynard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1862년 11월 24일 A. Maynard의 인도 하에 약 20여명이 첫 DPM 모임을 가졌다.
처음에는 그 모임이 의심받았으나 학장인 Dr. Howson과 유명하신 C.J. Vaugham 주교의 격려를 받으면서 DPM은 학교 안에서 영적인 갱신을 일으키는 모임으로 기대되었다. 그들은 결코 30명 이상 모이지 않았고 약 30분 정도 기도 후에 찬송을 하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내용이 채워졌고 이 모임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DPM 리더들은 한 학기 강사 한명씩 초빙하여 전도 집회를 가졌다. “당신의 온 마음은 주님께 드려야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이러한 날마다 기도모임은 다른 형태로 다른 대학들과 여러 기관으로 퍼져갔다. 예를 들어 Oxford나(1867년) 육군과 해군의 기독 장교들의 모임 혹은 변호사 기도회 그리고 London의 두 의대생 기도회(1874년) 등이다.
Ⅵ. 결 론 : CICCU 탄생과 그 특징들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가 되면서 일련의 학생운동들이 활발해지면서 국제적인 Scale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대학 간 여행과 전학이 용이해지고 초교파주의가 활성화되고 선교의 도전이 크게 환영을 받았다. 또한 도시가 늘고 대학들이 신설되기 시작하였다. 종전 영국에는 7개의 대학밖에 없었으나 19세기와 20세기 초기까지 12개의 대학이 신설되었다. 그래서 1880년대에서 90년대에 들어와서 학생활동은 범 대학적인 환경으로 확장되어갔다. 따라서 기독학생활동도 자연히 활발해져서 신학적 토론과 선교연구와 복음의 사회적 적응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런 가운데 선교학회, 신학회, 주석학회 등이 생겼고 신학연합회도 생겼다. Oxford와 Cambridge 두 대학의 협력도 활발해졌다.
그런데 1876년 11에 스코트랜드 전도자인 Sholto Douglas가 캠브리지에서 여러 대학들과 DPM에서 말씀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너희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왕하 18:20)라는 주제로 강력한 말씀을 전하여 학생들은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과 일본 선교여행을 다녀온 보고회를 CMU에서 가졌다. 그리고 18일 토요일 찰스 시므온의 King's College Chapel에 안장했던 달을 기념하던 이날에 약 60명의 학생들이 아침식사에 초대받아 The Hoop Inn에 모이게 되었다. 이 때에 초대 손님으로 캠브리지에 와있던 Douglas는 리더들에게 강한 어조로 기도회와 성경공부와 선교연구와 전도활동 등의 효과적인 활동을 위해 통합하고 조정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각 대학 Group들이 대표들 간의 규칙적인 협의를 위해 적절한 준비 필요성을 제안했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마침내 1877년 3월 9일 금요일에 약 250명이 모여 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an Union(CICCU, ‘kick-you’로 발음함)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각 칼리지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회장, 총무, 회계를 뽑았고 정관에 칼리지 중심 단위의 기본 이념 위에 대학전도와 기도의 연합을 위한 목적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CICCU는 DPM과 Charles Simeon이 1791년부터 시행했던 Holy Trinity교회의 주일 저녁설교, 토요 저녁의 성경 읽기, 선교사 초청 아침식사와 강연듣기, 각 대학마다의 성경 읽기 등 역사적으로 이어진 고유한 활동들을 다 함께 주간활동으로 포용하였다.
또한 ①대학 안에서의 그리스도 왕국을 이루며, ②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각자 성별되게 하고, ③각 대학마다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소식을 알리며, ④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제시하는데 힘썼다.
CICCU가 이렇게 한 것은 각 대학이 강한 세속적인 단체들에 대한 공동 방어적인 태세를 갖춤과 동시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전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CICCU는 처음 23년간(1877-1900)은 매 2년마다 대대적인 대학선교 운동을 위해 유명한 전도자들을 초청하여 연합집회를 가졌다. 그 대표적인 집회가 1882년에 가졌던 미국의 부흥사 Moody Mission이다.
또한 CICCU의 특징을 보면
첫째, DPM이 가졌던 복음적인 입장의 유지와 발전을 그대로 살려 나가며,
둘째, 전도활동을 활발히 하며
셋째, 기도의 매개체 역할과
넷째, CMU의 기본정신인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
다섯째, 영적인 생명의 자연적인 충만함
여섯째, 학생이 학생에 대한 자발적인 증거
일곱째, 기도와 Fellowship
여덟째, 가난한 아이들과 이방 세계에 대한 관심 등이다.
그리하여 복음적인 요소를 약화시키는 어떤 다른 사귐도 다 피하였다. 이러한 CICCU야말로 오늘날 전세계에 확산된 복음주의 학생선교운동의 전형(혹은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CICCU가 발전하여 전 영국적인 IVF(오늘날 UCCU)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 IVF가 발전하여 오늘날 세계 145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IFES가 되었다.
또한 이 모임은 장차 Scripture Union과 같은 Q. T. 활동과 Tyndale Press와 IVP를 통하여 기독교적인 관점이 반영된 여러 분야의 복음적인 저작들을 출판하여 문서 활동도 활발히 펴게 되었다.
또한 1919년 Oxford 대학과 연합하여 영국 지성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을 결단하도록 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Keswick 수련회를 창설하였다. 무엇보다 CICCU는 1930년대 신학 대학마저 좌경화하고 교회마저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가 되어 가는 영적 위기의 파도 속에서도 IVF가 있는 대학들은 모두 이 위기를 극복하고 복음주의 신앙을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Cambridge Seven을 시발점으로 Cambridge Seventy와 Cambridge Seven Hundreds로 발전하여 전 세계로 허다한 선교사 파송역사를 이루게 되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얼마나 대학문화와 국가와 민족뿐 아니라 세계선교와 기독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는가를 발견케 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야말로 각 시대를 초월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기독교의 영원한 가치를 보존하는 귀한 역사적 유산임을 확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