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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왜 교리교육을 하지 않나?

왜 우리는 왜 교리교육을 하지 않나?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 임경근 목사

  경남 거창 생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졸
  네덜란드 깜뻔(Kampen, Drs.)
  아뻘도우른(Apeldoorn, Th. D.)
  신학대학원 졸 
  현,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샘물기독학교 교목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필자는 어릴 때 교리를 배워 본 적이 없다. SFC운동을 열심히 했지만, 정작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배우지 못했다. SFC강령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을 열심히 외치긴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알리 없다. 물론 어떤 교회를 다녔는지, 어떤 교역자를 만났느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필자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SFC에서 교리교육을 강조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지만 그 영향력은 일반 교회로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다.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지금 교리교육을 얘기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첫째, 종교 개혁가들이 교리교육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살펴보겠다. 둘째, 왜 교리교육이 한국 개신교회에 약화되었는지 추적해 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특징이 교리교육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리가 무엇이며, 왜 교리를 배워야 하며, 교리교육의 유익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반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적 증거를 찾아볼 것이다. 그래서 종교 개혁사들의 정신을 배워 교회가 교리에 대한 관심을 다시 회복하고 전 성도들에게 교리 설교와 교육, 그리고 나아가 언약의 자녀들과 초신자들에게 교리교육을 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가정에서도 가정예배를 통해 교리를 가르칠 수 있다.


1. 교리?


1) 16세기 개혁가들이 소중히 여긴 교리

종교개혁(The Reformation) 때부터 개신교회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똑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다른 내용(교리)을 믿는 로마교회 때문이었다. 로마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는 중세 천년 동안 점점 성경의 진리에서 멀어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개혁가들을 보내셔 교회 개혁을 이루셨다. 사실 ‘종교개혁’이라는 말보다는 ‘교회개혁’(The Reformation of the church)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 교회개혁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 잘못 걸어간 길에서 다시 돌이켜 회개하고 본래 모습을 회복하려 한 것이다.

        

개혁가들(The Reformers)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다. 당시 보통 성도는 성경을 모국어로 읽을 수 없었다. 성경은 라틴어로 쓰인 것 밖에 없었기에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다. 성도는 성경을 읽지 못하니 성상이나 상징을 통해 신앙을 유지했는데 이로 인해 잘못된 미신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개혁가들은 로마교회의 어긋나고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는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정리해 성도에게 가르쳤다. 성경을 요약해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성경에 대해 잘 알아야 했다. 초대교회 영적 지도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공부했다. 본래 성경이 쓰여 졌던 구약 히브리어 성경과 신약 헬라어 성경을 직접 읽으며 기도하며 연구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개신교회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신앙고백 혹은 요리문답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중세 천년 동안 암흑 속에 살던 성도는 성경의 복음을 요약해 설명해 주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진리를 듣고 깨달아 믿음으로 구원을 확신하고 기뻐했다.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로마교회는 개신교회를 핍박했다. 고문과 투옥과 화형의 위협에도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를 누린 성도는 담대히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수많은 성도가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순교했다.

  

이 시대에 성경과 교리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요 은혜였다. 개혁가들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를 많이 만들었다. 루터(M. Luther)는 어린이를 위한 소요리문답서를 만들었다. 칼빈(J. Calvin)도 요리문답서를 만들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라는 훌륭한 책을 썼다. 이 책은 성경 내용을 잘 요약한 것이다. 성경을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안내서 곧, 핸드북(Handbook)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쓰여 진 책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책이기도 하다. 쯔빙글리도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개신교회가 만든 신앙고백이나 교리서는 64개 정도 된다고 한다.


요즈음은 안타깝게도 이렇게 좋은 신앙고백서나 교리서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옛날보다 바쁘기 때문일까? 사실 이미 좋은 신앙고백서나 교리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새삼스럽게 또 다른 것을 만들 필요가 없기도 하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지 않은가!


2)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 현대인

그런데 요즘 교회는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가 교리라고 배운 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제 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본분이 무엇인가요?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본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니이다.” 너무나도 분명한 진술이다. 참으로 성경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필자의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더 이상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교리를 제대로 배운 교인들이 별로 없다. 개혁자들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개신교회가 왜 교리를 가르치지 않을까? 교리가 훌륭한 성경 안내서인데도 말이다.


최근 알게 된 천주교인을 통해 들은 얘기다. 그는 개신교 시설에서 한 아이를 입양했다. 당연히 그는 자기가 다니는 성당에 데리고 간다. 놀라운 것은 그 아이가 매 주일 방학에도 예외 없이 하루 저녁 교리를 배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몇 년 동안! 로마교회가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로마교회를 개혁하고 바른 교리를 정리한 개신교회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있는 것일까? 그 원인을 추적해 보자.


2. 교리는 싫어!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복음주의’(福音主義)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이다. 복음주의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한국 교회가 왜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는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 모든 개신교를 총망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그 모양과 특징이 다르고, 현재 교회도 여러 교단과 교파들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실체와 모양을 정의하기 쉽지 않다. 복음주의는 어느 한 사람이나 교파에 국한되지 않은 광의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대체로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그리고 18.9세기의 부흥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이는 각 나라와 교회의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세 가지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둘째, 성령의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한다. 셋째, 성도를 전도와 선교로 동역화 한다. 이 세 가지 복음주의의 특징이 교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자. 


1) 오직 성경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 정신을 잘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귀하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그 해석의 기준이 각 개인에게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위험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공통된 신학체계가 없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해야지 어떤 신학이나 교리를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겠다는 것은 좋지만, 그 해석이 교회마다 목사 개인 마다 다르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문자주의나 성경주의(biblicism)적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틀이 없기 때문에 결국 목사 한 개인의 경험과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결국 목사의 생각이 신학이나 교리가 되는 샘이다. 이런 복음주의적 입장은 자연스럽게 교리를 등한시하게 된다. 복음주의는 성경을 보는 좋은 틀린 신앙고백과 교리를 제대로 강조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신앙고백과 교리를 무시하거나 잘 가르치지 않는다.


2) 개인의 신앙과 경험

신앙은 본래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부르신다.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가 개인적 신앙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 개인적 신앙과 경험으로 기독교 교리를 만들려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교회 역사 가운데 신앙의 선배들일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자신의 신앙 경험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 개인적 체험과 구원에 관심이 많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에 대한 관심은 적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잘 정리한 신앙의 체계인 신앙고백과 교리에는 더 관심이 없다. 공(a catholic) 교회적인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3) 전도와 선교

복음주의는 복음 전도와 선교에 열심이다. 교회의 모든 동력이 전도와 선교에 맞추어져 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말씀을 선교학적 관점에서만 적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이 전도와 선교를 넘어 더 폭 넓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명령어는 ‘제자를 만들라’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한다. 가서 복음을 전해 세례를 주는 선교와 전도에서 중단한다. 말씀을 가르쳐 지키는 평생에 걸친 부분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 단계까지 포함한 것이 제자도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례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모든 영역에 신앙고백과 교리는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복음주의에서는 복음을 너무 단순화시켰다. 성경의 내용을 성도들과 다음 세대와 초신자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한국 교회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교리를 등한시하게 된 것이다.


3. 교리가 무엇인가?

그러면 교리가 도대체 무엇인가? 교리(敎理)는 ‘신앙의 체계, 원리, 이치’를 말한다. 교리를 ‘요리’(要理)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요리’는 ‘중요한 교리’, 혹은 ‘요긴한 교리’라는 뜻이니 ‘교리’와 크게 다른 말은 아니다. 

        

교리는 일종의 ‘지도’와 같다. 지도는 전체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간결한 그림으로 잘 표시해 준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곳을 쉽게 찾아가려면 지도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어떤 사람이 에버랜드에 놀러 갔다. 처음 방문한 사람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지도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불평한다. “왜 귀찮게 지도를 만들지?” “지도가 있으면 창의력이 없어! 내 마음대로 모험도 해 보지 못하고......” 그런 사람은 지도 없이 닥치는 대로 구경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방법은 아니다. 지도가 있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즐겁고 유익하게 보낼 수 있다.

       

지도는 참고하기 위한 보조도구이다. 지도가 있지만 직접 에버랜드를 다니며 재미있는 거리들을 즐겨야 한다. 지도만 보고 “다 봤다! 뭐 별로 재미없네!”라며 ‘에버랜드는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가서 즐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도는 실재를 대체할 수 없다. 단지 실재를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재미없다고 지도를 던져 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지리학자가 지도를 먼저 연구하고 밖으로 나가 실제 지구의 표면을 연구한다. 생명은 짧고 세계는 매우 넓다. 한 사람이 혼자 스스로 지구의 표면을 연구한다면 지구의 표면 중에 매우 작은 부분 밖에는 연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지도를 조사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의 이유가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구를 연구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지도가 존재한다. 지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매우 정확하다. 그러므로 세계 지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세계를 다니면서 지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방법은 먼저 좋은 지도를 가지고 지도를 통하여 세계지형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도를 통해 세계 지형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알고 난 후에 직접 지구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 지도가 정확한지 아닌지 시험할 수 있어.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사실들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혼자 이것을 다 해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것을 믿음의 선배들이 오랜 세월동안 연구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리이다. 이 교리를 영적인 지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다. 특별히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이 교리를 보존해 왔다. 교회의 공적인 의미에서도 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지도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교리가 대부분 정확할지라도 틀릴 수 있다. 만약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조사하고 검사한 후 결론을 내리고 절차에 따라 수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리는 실재 자체가 아니고 보조 도구이기 때문이다.  

        

4. 왜 교리교육을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사람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성도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성장한다.

       

그런데 왜 성경 외에 교리를 배워야 하는가? 성경에 뭔가 부족한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오직 성경으로 충족한데 다른 어떤 것을 덧붙이려고 하는 것은 복음에 심각한 손상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어디에 갔는가? 성경 이외에 또 다른 어떤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는 교리를 배워야 하는가?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성경을 열심히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교리를 배울 이유가 무엇인가?


1) 방대한 성경을 짧게 가르치고 배워야

성경은 생각보다 길다. 전체를 다 읽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성경의 내용 핵심을 배울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 또 어린 언약의 자녀들에게 성경을 요약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교리(신앙고백 혹은 요리문답)가 필요하다.


2)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내용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다. 그러나 원어(구약: 히브리어, 신앙: 헬라어) 성경은 아무나 읽을 수 없다. 공부한 일부 사람만 원문을 읽고 본래 뜻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 좋은 번역 성경이 있어 감사하다. 그러나 번역이 잘 되어 있는 성경도 이해하기 쉽지 않고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내용들도 있다. 성경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신다고 믿는데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단들은 우리가 성경에 없는 것을 믿는다고 공격한다. 예수님은 신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아니면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인가?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인가? 아니면 행위도 있어야 하는가? 왜 유아세례를 드리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는 교회가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분명한 입장이 정리 되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교회와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 도리(道理)에 대해 말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리이다. 


3) 초신자와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요약해 가르쳐야 할 필요성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에 처음 들어온 신입 교인에게 복음을 요약해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성경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핵심을 가르치기 위해 교리가 필요했다. 더 나아가 교회의 어린 자녀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특별히 개혁가들은 로마교회를 염두에 두고 바른 교리를 정리했다. 요리문답 형식으로 만든 것도 있고 교리를 정리한 신앙고백 형태로 만든 것도 있다. 지금도 그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리가 더 절실하다.

                

4) 이단자에 변론하고 기독교 진리의 탁월성을 증거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다른 신앙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고 양을 탈을 쓴 늑대처럼 교회를 어지럽혔다. 지금도 이런 무리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이단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변론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정확하게 진술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 선생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했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그로 인해 생겨난 신앙고백 혹은 신조들이 많이 있다. 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콘스탄티노플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등이 있다. 이 신앙고백들은 성경의 내용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진술하고 있다. 교회가 이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


5)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 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보편적이다. 시대와 장소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를 이룬다. 성경에 대해 다른 해석, 곧 다른 믿음을 가지는 이단들이 많은 시대에 교회가 보편(catholic) 교회의 입장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편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는 신앙고백이나 신조나 교리가 필요하다. 


5. 교리가 필요 없다?

사람들은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교리가 성경의 충족성에 배치된다’는 생각은 교리를 오해한 까닭이다. 교리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세운다. 교리가 성경의 진리를 조직화 하고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포함하는 범위에서 교리는 의미가 있다.


교리가 신앙 양심을 속박한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고 교리적 요소를 발견하고 정리할 수 있기 전에 교리는 너무 빨리 정답을 준다. 또 개인 스스로 연구한 성경과 교리의 내용이 다를 수 있다. 그런 경우 신앙양심에 속박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개인적으로 교리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신중한 연구와 절차와 질서를 따라 교리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가 성도의 신앙 양심을 구속하거나 속박한다는 것은 아니다. 


교리가 신학연구의 길을 막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대단히 자신 만만한 태도다. 그러나 꽤 오만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 특별히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는 자에게는 저주가 선포되어 있다. 기존 있는 교리의 일부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얼마든지 신학적 연구를 통해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31장에 위정자가 교회의 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은 후에 수정되었다. 같은 내용 벨직 신앙고백 36장도 마찬가지로 변경 수정되었다.


교리는 삶과는 무관한 내용들이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사색이거나, 살아 있는 믿음과 경이로운 신앙적 체험과는 상관없는 메마르고 딱딱한 공식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감상적이거나 활동적인 사람들은 교리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리는 지도나 메뉴얼과 같이 실제 삶과는 다를 수 있고 정보가 극히 제한적일 수 있지만,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교리나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 선배들의 귀중한 영적 유산을 확인할 수 있다.


6. 교리교육의 유익


1) 신앙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어

우리가 믿는 것을 불신자에게 정리해서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나의 경험이나 체험으로 잘못 얘기하면 진리가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혹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감하거나 더하거나 왜곡하는 무서운 죄이다. 그래서 이단을 경계한다. 이단들은 진리의 말씀을 약간 다르게 가르친다. 그렇지만 치명적일 수 있다. 만약 바른 교리를 잘 알지 못하면 이단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잘 배운 아이는 절대로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교리를 잘 배우고 있던 한 아이가 부모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엄마! 저 사람이 얘기하는 것들이 우리가 믿는 것과 같아?” 뭔가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는 틀린 것을 들으면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다. 정확한 교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신앙을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우리의 삶을 잘 계획하고 일관되게 살면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내용도 일관성이 있고 누가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인 진술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죄와 비참’을 서술하고, 둘째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셋째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죄와 구원과 감사가 논리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나’의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주관적인 적용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나’의 정체성이, 죄로 인해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에 비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우리’의 입장, 곧 좀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제 1문이 ‘삶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두 요리문답 공통으로 통일되고 자체 모순 없이 논리적 순서에 따라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3) 성경의 중요한 개념들에 대해 잘 정리된 개념을 배울 수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에 나오는 단어가 아니지만, 분명히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삼위로 계시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음을 교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죄란 무엇인가? 죄에 대해 우리는 도덕적인 잘못만 생각한다. 그러나 교리는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진술한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4문 “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보면 “죄란 하나님의 법을 여하히 부족하게 준행하거나 불복하는 것이다.”라고 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의 죄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가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줍니다. 42문 답: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 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중요한 성경의 내용이 교리와 신앙고백에 잘 정리되어 있어 매우 유익하다.

  

7. 성경적 증거

성경도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교리를 가르쳐야 할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의 말로 우리가 믿는 바를 시인하는 것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 선생은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여기에서는 고백하는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디모데에게 편지한 내용을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디모데가 믿는 바 내용을 다른 사람 앞에 증언해야 했으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일관성있게 정리한 교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요한도 신앙고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사도들이 활동했던 초대교회 때부터 요리문답 형태의 교리교육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질문과 답’은 교육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것이 소위 교리문답교육(catechism)이다. 본래 세례를 받기 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신앙을 교육하던 것이었다. 후에 믿는 자의 자녀들에게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었다.


8. 나가며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1618-19년에 열린 도르트(Dordt) 회의에서 세 가지 교리(벨기에 신앙고백, 도르트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그 중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목사가 매 주일 설교하도록 법으로 확정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지금도 이 교리를 아끼고 사랑하고 매 주일 설교할 뿐만 아니라 주중에 자녀들에게 교리교육 시간에 담임목사가 직접 가르친다. 아이들은 입교할 때쯤이면 모든 교리를 외울 수 있다. 학생들은 적어도 기본 7년 동안 교리교육을 받는다. 이렇게 교육 받은 아이들은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보존하고 특별히 교회의 다음 세대인 자녀들에게 성경을 전수해 주는 것이다. 그 방법이 교리를 잘 가르치는 것이다. 교리가 성경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5월부터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분당근처 여러 가정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제 용인 마북동에 자리를 잡았다. 구향상교회 건물 일부를 빌려 사용한다. 이름을 ‘다우리 교회’라 지었다. ‘교회다우리!’, ‘성도다우리!’, ‘부모다우리!’, ‘학생다우리!’라는 의미를 담았다. 또 교회의 특징인 진리 안에서 하나 됨, ‘all-we’의 의미도 있다. 또 ‘자녀 대하!’라는 의미도 있다. 언약의 자녀를 많이 낳아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런 분위를 만들자는 의미이다. 다우리 교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교리도 들어간다. 지금은 매 주 토요일에 모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배운다. 먼저 아이들이 질문과 답을 암송한다. 앞에 나와 암송발표도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암송을 잘 한다. 충분한 시간을 주고 집에서 부모와 함께 외우기 때문에 초등학교 저 학년 아이들도 큰 어려움 없이 따라온다. 반드시 이 교육에는 부모도 반드시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주 유익한 시간이다. 부모들도 그 동안 애매했던 성경과 교리적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 좋아한다. 암송이 끝나면 암송한 내용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 준다. 질문도 해 가며 역동적 강의를 시도한다. 아이들은 결코 지겨워하지 않고 흥미 있게 교리를 배운다. 혹시 아이들이 아직 그 깊은 뜻과 가치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부모와 교회에 반드시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가르칠 날도 올 것이다.

 

2011년 06월 14일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