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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역사 (1) 영국을 중심으로

1) 초대 기독교회

 

신약성서에는 첫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 안의 모임처소인 한 다락방에서 성모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지내다가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신약성서 사도행전 참조)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은 가르치는 사도(apostles)가 되어 로마제국 전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특히 유대교인으로 기독교의 극렬한 박해자였던 청년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 극적인 회심을 하여 사도가 되었고 그는 자신이 배운 헬라세계의 세계관에 기독교를 접목시켜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세계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기독교회는 상당한 기간 동안 특별한 건물이 없이 가정에서 모였으며 대표적 장소들은 신약성서의 서신서들의 수신지로 되어 있는 코린트, 필립보, 로마, 에페소, 라오디게아, 골로사이 등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토요일을 피해서 부활의 날인 일요일에 모임을 가졌으며 순교성인 유스틴(St. Justin)의 기록에 의하면 예배 양식은 성서낭독, 설교, 기도, 봉헌, 감사기도, 성찬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비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행했던 고아와 가난한 이들과 과부에 대한 광범위한 구제 사업에 놀랐으며 이들이 실천한 사랑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서로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고 경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신격황제숭배를 기독교인들이 곳곳에서 거부하면서 기독교는 박해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오히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증언할 정도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순교를 각오하고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잘 알려진 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서기 313,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는 박해받지 않는 로마제국의 한 종교로서 공인되었고 서기 380,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인 국교로서 선포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랄 수 있는 성서는 구약성서가 이미 B.C.2-3세기경 히브리어에서 당시 지중해 세계의 국제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어(70인역, Septuagint)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한 몇 개의 복음서들과 사도들이 저술한 서신서들이 읽혀지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공인된 27개의 신약성서 목록이 구약성서와 외경을 포함한 목록과 함께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경(正經, canon)'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성서가 바로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성공회 등 공교회가 사용하는 성서입니다.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가 되자 그동안 눌려있었던 신학적 의문들과 다양한 견해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으며 여기에 단지 출세를 위해 기독교 성직자가 되는 이들이 뒤섞이면서 교회는 열정적 토론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의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개념의 문제를 가지고 초대교회는 격렬한 토론 끝에 여러 번의 공의회를 통해 사도들의 신조(사도신경) 이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선언하여 이 문제들을 정리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교회 내의 혼란을 피해 순전한 영성생활을 함으로서 함께 진리를 연구하는 이들이 모여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과 성찬의 예배와 성서와 신경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활발한 구제활동과 순교, 수도원활동 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4~5세기를 통해 드러난 초대교회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반도, 북 아프리카와 이집트, 소아시아 등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또다시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2) 영국성공회

영국의 초대교회

성공회의 모국이랄 수 있는 영국 땅에는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3세기 이전부터 영국 땅에도 기독교인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 서기 314년에 열린 아를르 공의회에 3명의 영국교회 주교들이 참석한 것을 비롯, 그 이외의 공의회들에서도 영국 주교들의 참석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6세기경, 로마의 주교였던 성 그레고리는 성 어거스틴 수사(히포의 주교 어거스틴과 다른 인물)를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로 파견하였습니다. 그에 의해 켄트의 왕 에델버트가 캔터베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땅에 거주하였던 켈트족에게는 이미 성 콜룸바 수사, 성 패트릭(아일랜드의 주교)에 의해 활발한 선교활동이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성 베다는 베네딕트 수도회 수사로서 로마제국의 막대한 사본들을 이용하여 40편이 넘는 역사, 과학, 신학 부문의 저작을 남겼으며 대표적인 것은 『잉글랜드 교회사』가 있습니다.

켈트 수사들과 로마에서 파견온 수사들 사이에는 대표적으로 부활절이 서로 달라 664년 휘트비에서 회의를 개최하였고 논의 끝에 영국은 로마의 관습을 수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영국의 캔터베리와 요크로부터 성 보니파스와 성 윌프리드가 각각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기독교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영국 땅은 초대교회 때부터 두드러진 기독교 신앙의 땅이었습니다. 로마주교(교황)의 통치가 전유럽을 호령하며 수세기를 지났을 때, 유럽 각지에서는 종교개혁의 염원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옥스퍼드대학 교수이며 사제인 존 위클리프(1330-1384)가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특히 라틴어 불가타 성서를 대중들이 읽을 수 있게 영어로 번역하였으나 순교당해야 했습니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르네상스의 물결과 함께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 등 위대한 인문학자들이 성서주해서를 저술하는 등, 종교개혁의 밑바탕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헨리8세와 성공회의 독립

이제 저 유명한 영국 국왕 헨리8세와 성공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회’라고 하면, ‘아, 헨리8세가 이혼하려고 떼어 나온 교파?’라고 비난합니다. 교회의 태생 자체가 건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다릅니다. 헨리8세는 원래 독실한 로마교회 신봉자로 스스로 종교개혁적 경향들을 거부하여 로마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했던 로마교회 충성파였습니다.

헨리8세는 강대국 스페인 왕실의 왕녀였던 캐더린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헨리8세의 형수였으나 헨리7세가 일찍 죽어 정략결혼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헨리8세는 로마교황의 특별허가형식으로 형수와 결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결혼에서 헨리는 동맹은 지켰지만 원하는 왕자를 얻을 수 없었고 그래서 다시 교황에게 허락을 얻어 이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황은 당시 스페인 왕 찰스의 무력통치 하에 있었으므로 확답을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영국의 로마교회는 극히 부패하여 수도원들이 부의 원천이 되었고 국내의 재화도 로마교회에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영국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졌고 이때에 헨리는 종교개혁자들인 토마스 크롬웰을 자문으로, 토마스 크랜머를 새 캔터베리 대주교로 세워 로마교회로부터 영국 교회의 독립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만약 정말 헨리8세가 개인적인 애정문제로 영국교회를 좌우하려 했다면 귀족과 전국민적 반대에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헨리8세는 영국 내부의 종교개혁적 열망과 대륙의 개혁세력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과 함께 영국교회의 재정, 행정, 인사권의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로마교회에 바치던 세금을 중단하고, 로마교황의 재판권을 거부하였으며, 영국교회 성직자임명이 영국인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진정한 성공회의 탄생

헨리8세는 본래 로마교회의 관습과 제도에 호의적이었으므로 독립한 영국교회를 개혁된 공교회(Reformed Catholic)로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 종교개혁을 시도한 크롬웰에 의해 수도원이 대거 정리되었고 새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에 의해 성공회는 개혁의 영향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영국 전역의 교회는 영어성서를 비치하여 신자들 누구나 성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에드워드6세 때에 성당에서 성화와 성상을 제거하고 영어로 성서를 낭독할 것과 특히 성체성사에서 신자에게 성체와 보혈을 모두 받도록 하며 성직자 독신제도를 폐지하고 개혁신학을 수용한 공동기도서(1549)를 사용할 것을 국회에서 결의하였습니다. 바로 이 기도서에 기초하여 전세계 성공회는 각국의 상황에 맞게 기도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의 화체설(化體說; 성체와 보혈이 그 자체로 예수의 실질적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과 칼빈주의를 모두 거부한 ‘39개조’(The thirty-nine Articles)를 신학으로 확정했습니다.(1571)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영국 국내에서는 무수한 정치적 변동에 따라 로마가톨릭 신봉자들이 순교하거나 종교개혁자들이 순교하는 일이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로서는 로마가톨릭 복고나 종교개혁만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절망을 느낀 청교도(Puritan)들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으며 스코틀랜드는 칼빈주의를 수용하여 장로교를 받아들였고 열정적 복음전도자였던 성공회 사제 요한 웨슬레는 감리교(Methodist)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계속해서 양극단을 지양하는 중용의 길(via media)를 특유의 신앙지향으로 삼았습니다.

 

성공회와 옥스퍼드 운동

18~20세기에 이르러 영국이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함에 따라 전세계에 성공회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세계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 시기에 영국제국은 노예무역과 식민지무역으로 부를 창출했지만 그 그늘은 아주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이며 복음주의자였던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기도와 노력 끝에 노예제도 폐지를 자신이 죽기 직전에 보았으며 그의 정신은 지금도 현직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와 영국 최초의 흑인 대주교인 존 센타무 요크대주교에게 이어져 노예무역에 대한 전적인 사과를 영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공회 안에는 청교도들과 요한 웨슬레 같은 복음주의자(근본주의와는 다른 의미의)들에 의해 흐르는 저교회파(Low church)와 옥스퍼드 운동으로 대표되는 고교회파(High church)의 흐름이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명칭들은 교회 전통의 가치를 높이(high) 평가하는 이들과 성서와 복음전도 등에 비해 낮게(low) 평가하는 이들이라는 뜻에서 나온 명칭입니다. 저교회파 성공회인들은 C.S.루이스, 존 스토트 사제와 같은 이들이 있고 고교회파 성공회인들은 존 키블과 존 헨리 뉴먼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고교회파는 대한성공회와 깊은 관련이 있기에 덧붙이자면 이들은 옥스퍼드 운동을 통해 영국 국교회로, 국가의 공무원으로 안주하며 나약해진 신앙행태를 비판하고 국가에 대한 성공회의 독립성과 공교회의 유산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해 전례가 회복되어 성찬례가 매주 시행되었고 예복과 성당건축, 성사의 강조 등이 성공회의 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성공회를 선교하려고 했던 이들이 바로 한국에서 선교했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주교와 사제들이었습니다. 서울대성당의 건축과 성물들은 옥스퍼드 운동과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희귀한 증거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는 영국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이자, 세계 성공회의 상징적 수장입니다. 현재 로원 윌리엄스(Rowan Williams) 대주교께서 제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역할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1) 영국 캔터베리 교구의 교구장 주교입니다. 이 교구는 영국 교회사에서 가장 오래된 교구입니다.

2) 영국 캔터베리 관구 전체를 관장하는 대주교로서, 이 관구는 영국 남부의 3분의 2를 차지합니다.

3) 영국 전체를 대표하는 관구장입니다.

4) 세계 성공회의 상징적인 수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나라 성공회의 관구장 주교 및 교구장 주교들과 "동등한 관계 안에서 수장"으로서, 강제적인 치리 권한은 없습니다. 1867년 이래 캔터베리 대주교는 전 세계 성공회의 주교회의인 램버스(Lambeth) 회의를 10년마다 소집하여 주례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공식웹사이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

참고문헌:

마이클콜린스/매튜A.프라이스, 『기독교역사』, 시공사, 2001.

김진만, 『거룩한 공회-대한성공회교회해설』, 맑은울림, 2004.

최철희주교, 『세계성공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96.

대한성공회선교교육원, 『성공회의 역사-통신신학교육시리즈(1), 대한성공회출판부, 2006.

홍영선사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새로운 나, 우리-대한성공회교리해설서』, 대한성공회출판부, 2004.

대한성공회선교교육원, 『성공회신앙의 이해』, 대한성공회출판부, 1998.

이대용사제, 『성인소사전』, 대한성공회출판부,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