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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역사 (2) 대한성공회

3) 대한성공회

중국과 일본에는 한국보다 이르게 성공회가 선교되고 있었고 이들의 요청으로 벤슨 켄터베리 대주교는 1889 11 1(모든 성인의 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교구장 존 코프(Charles John Corfe)사제를 주교로 서품하였습니다. 코프 주교는 중국 북부에서 2년간 성공회 주교를 보좌했으며 당시에는 영국 해군 군종사제로 있었습니다.

한국성공회 초대주교인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는 1890 9 29일 제물포(인천)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제물포와 서울에 토지를 매입하고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897년에 강화도 사람 김희준에게 영국인 사제 트롤로프가 마가(Mark)라는 신명(信名; 세례명)으로 첫 세례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는 의료선교와 고아원복지사업을 통해 선교했으며 선교15년만인 1904년에 사임했습니다. 그동안 성공회는 12개 교회, 5개 병원과 성베드로 수녀원, 고아원1개소, 학교1개소, 출판소1개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대 주교인 터너(A.B.Turner, 단아덕) 1905 1 25일에 주교로 축성되어 대한성공회 제2대 교구장으로 승좌했습니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성공회 신자는 수천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으며 영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여 재임 5년간 9명의 성직자와 2명의 약사, 4명의 간호원, 2명의 수녀, 5명의 교역자, 1명의 의사를 선교단에 참여시키고 1910년에 일본인 시오자키 앤드류 사제를 영입하여 부산에서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서울YMCA의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는 등 많은 업무를 수행하다가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1910 11 28일 선종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그의 소망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의 재임동안 서울 정동 3번지(현 서울대성당 자리)를 매입하여 교구본부를 이전했고 17개 교회를 설립하고 8명의 한국인 전도사를 세웠습니다.

3대 교구장 주교인 트롤로프(M.N.Trollope, 조마가)주교는 1911 7 25일에 주교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토착화에 노력했으며 첫 한국인 사제로 김희준 마가를 서품하였으며 강화읍에 성베드로와 성바울성당을 한옥양식으로 건축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전례를 위하여 『조선성공회 공도문』을 1549년 영국성공회 공동기도서를 번역하여 출판하였습니다. 또한 강화에 성미가엘수도원을 축성하여 성직자교육기관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1916년에는 ‘조선성공회 헌장 및 법규’를 제정하고 제1차 조선성공회 교구의회를 주관하며 조선성공회연감을 간행하였습니다. 1922 9 24일 서울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였으나 재정부족으로 수랑(transept)은 제외한 채 성단(sanctuary)와 신랑(nave)일부만을 완공한 형태로 3년 뒤 1926 1 23일 ‘성모와 성 니콜라의 서울대성당’으로 축성하였습니다. 그는 자립을 강조하여 한국인들의 봉헌으로 성직자 급여를 충당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1930 11 6, 영국에서 열린 제7차 람베스 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에 일본 고베항에서 선박충돌로 68세를 일기로 선종하여 서울대성당 지하성당(세례자요한성당)에 묻혔습니다.

4대 교구장 주교인 쿠퍼(A.C.Cooper; 구세실)주교는 1931 6 11일 영국 런던 성 바울 대성당(Saint Paul Cathedral)에서 주교품을 받고 조선교구장에 승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임기간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을 해외로 추방시키고 기독교를 적극 탄압하던 시기였으므로 정상적인 주교 업무 수행이 불가능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한국성공회는 일본인 성공회 주교의 관리를 받아야 했고 교회 기물은 공출로 강탈당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영국인들이 기증했던 서울대성당의 종만은 일본인 주교가 종을 뜯어가려면 건물도 헐어야 한다고 주장한 끝에 공출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뒤, 1946년에 쿠퍼 주교는 차애덕(Chadwell)사제와 홍갈로(Hunt)사제와 함께 귀국했습니다. 그 뒤로 1947년에 위요한(B.Whelan )사제와 이도암(Albert Lee)사제, 오해리(W.H.C. Fawcett)사제, 클라라(Mary Clare)수녀가 귀국하여 다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쿠퍼주교는 윤달용 모이서 사제와 홍갈로 사제, 클라라 수녀, 이도암사제, 조용호 디모데 사제 등과 함께 납북되었습니다. 홍갈로 사제는 죽음의 행진 도중 쿠퍼주교의 품에 안겨 별세했고, 클라라 수녀 역시 수녀복을 빼앗기고 일반복을 입은 채 별세하여 로마가톨릭 수녀들에 의해 북한 땅에 묻혔습니다. 쿠퍼주교는 3년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영국으로 석방되어 1953 11월에 귀국했지만 건강상실로 업무수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쿠퍼주교가 납북되자 한국성공회 보좌주교로 차드웰(차애덕)사제가 1951 11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피난민들을 돌보며 선교업무를 수행하였고 재임기간 동안 러트(C.R.Rutt; 노대영)사제 등 4명의 사제들이 입국하였습니다. 그는 1963년까지 보좌주교로 선교에 힘쓰다가 1967 11 21일 선종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습니다.

5대 교구장 주교인 존 데일리(John.C.S.Daly; 김 요한)주교는 1955년 교구장에 승좌했습니다. 그는 서아프리카와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 한국에 부임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교구들은 데일리 주교를 후원했으며 미국에서는 토리(R.A.Torrey; 대천덕)사제를 보내 성 미가엘 신학원 재건에 협력했습니다. 그의 재임동안 성직자 유학을 길을 열어 이천환 사제는 영국 성어거스틴 대학으로, 배두환 사제는 미국 나쇼다하우스대학으로, 최철희 사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성 프란시스신학대학으로 유학하였습니다. 데일리 주교는 특히 산업선교를 시작하여 강원도 황지 광산촌에 선교의 집을 짔고 선교를 시작하였고 부산에서는 빈민구제를, 경기도 마석에는 음성 한센병 환자들의 정착을 후원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성공회 초기선교기의 선교사 주교들의 시대는 1965 5 27일 이천환 사제가 한국인 최초로 주교로 서품된 뒤 서울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승좌하고 데일리 주교는 같은 해 대전교구장에 승좌함으로서 2개 교구로 분할하였습니다. 대전교구에는 곧 러트(노대영)사제가 2대 대전교구장 주교로 서품, 승좌하였으며 6년 뒤, 대전교구를 1974년 분할하여 부산 교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1974 6 1일에 대전 교구에는 배두환 주교, 부산 교구에는 최철희 주교가 서품되고 교구장으로 승좌함으로서 3개 교구로 성장하고 모두 한국인 주교를 맞음으로서 새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서울교구장 이천환 주교는 12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후임으로 제2대 서울교구장으로 김성수 시몬 주교가 1984 5 31일 서품받고 승좌하였습니다. 그는 11년간 8개 교회를 설립하고 4개의 나눔의집(사회선교기관)을 개설했으며 관구를 설립하고 선교100주년 행사, 서울대성당 증축, 성공회대학교 발전 등에 힘썼습니다.

1990 9 29, 대한성공회는 선교100주년 기념대회를 로버트 런시 캔터베리 대주교의 참석하에 대한성공회 3개 교구장 주교, 세계성공회 주교, 성직자, 평신도와 수사, 수녀들 등 8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잠실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기념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이 해에 대한성공회 성가를 새로 출간하였습니다.

또한 1996 5 2일에는 숙원사업이었던 서울대성당 완공이 난관 끝에 원안대로 70년만에 건설되어 축성되었습니다.

1993 4 16, 대한성공회는 성공회의 한 관구(Province: 자율적인 교회공동체로서 해당 대주교Archbishop/수좌주교Presiding Bishop의 관할)로 발전하여 초대관구장으로 김성수 시몬 주교가 승좌하였습니다. 이로서 대한성공회는 영국 캔터베리 관구로부터 103년 만에 독립관구로 새출발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최철희주교, 『세계성공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96.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양화진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 홍성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