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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aly/이것 저것 관심사

자살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우병훈 목사, 신학과 서양고전학 클럽 theologus.cyworld.com 운영자)


제가 예전에 썼던 "자살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싣습니다.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I. 빌헬무스 아 브라켈(1635-1711)

아 브라켈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청교도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다. 그는 자살 문제를 그의 책 『기독교인의 합당한 예배』(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III권 197-199에서 다룬다. 이 부분은 십계명 제 6계명을 다루는 부분인데, 그는 타인 살해를 다루기 전에 자기 살해 즉 자살 문제를 다루면서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1. 자살로 문제가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사후 세계와 심판이 분명히 존재한다.

2. 자살 뿐만이 아니라 자기 몸을 잘 돌보지 않는 것도 죄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신다든가, 폭식한다든가, 너무 잠을 많이 자는 것 등.

3. 위험한 일을 즐기는 것도 죄에 속한다.

4. 맞아 죽을 것이 뻔한 싸움을 일부러 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

5. 삼손의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규칙에 따라 살아야지 이런 예외적인 예를 규칙으로 삼고 살아서는 안 된다.

6. 자살로 인한 죄는 계속 남아서 그를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II. 디이트리히 본회퍼

본회퍼가 1948년에 제 5판 머리말을 쓴 그의 대작 『윤리학』(Ethik)은 자살 문제를 다룬 윤리서로서는 가장 주의해서 봐야할 작품으로 뽑힌다. 독어판은 111-116쪽이고, 손규태가 번역한 한글판은 142-8쪽이다. 아래에 본회퍼의 주장을 정리해 본다.

1. 인간은 자기 의지대로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점이 동물과의 차이점이다. 인간은 죽을 자유를 갖고 있기에 고귀한 일을 위해 생명을 걸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이 희생적 자유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자유도 있을 수 없고, 인간적인 생명도 있을 수 없다.

2. 인간은 자유로운 결단에 따라 죽음으로써 운명에 패배하지 않고 승리한다. 스토아 학파에 의해서도 자살은 찬양되었다. 인간은 자살함으로써 비인간적인 운명에 대해 인간성을 과시한다. 그래서 자살은 고귀한 인간들에 의해서 거듭 찬동되고 정당화되었다.

3. 자살은 단순히 비겁함과 연약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자살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옳았다고 하는 자기-칭의이다. 자살의 본래적 요인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이다.

4. 생명의 긍정이 오로지 생명을 부정하는 데서만 성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인 자살을 볼 때에 우리는 전율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그 행위 배후에 있는 무서운 고독과 자유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도덕이나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자살자는 생명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만 죄를 범하는 것이다.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자살은 불신앙으로 비난 받게 된다.

6. 불신앙은 고귀한 동기에서 나온 행위일 수도 있고, 비천한 동기에서 나온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불신앙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죄가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칭의를 믿지 않는 것이 된다. 불신앙은 자살로써 운명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운명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는 그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숨긴다. 따라서 죽음을 향한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비롯되지 않고 사용된다면 잘못 사용한 것이 된다.

7.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며, 따라서 자살도 죄가 된다.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외에 자살을 비난할 필연적 근거는 없다.

8. 자살의 동기는 항상 불순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오히려 인간은 저속한 동기로 생명을 택할 수도 있다.

9. 자살은 더 이상 회개할 가능성을 없게 만들기 때문에,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따라서 용서 받지 못할 죄가 된다는 말도 타당성이 없다. 많은 기독인들이 급박한 죽음(예를 들어 교통사고) 때문에 죄를 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생각해 보라.

10. 성경 어디에도 자살을 명백하게 금지한 규정은 없다. 그러나 자살은 가끔 중대한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히도벨이나 유다의 경우.

11. 하나님은 자살을 금하는 대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를 은총과 자비로 부르신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않은 사람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영만이 도움이 된다.

12.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타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시켜야 할 때에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생전에 그에게 가혹했던 하나님의 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13. 자살은 고독 중에 빚어지는 행위이므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동기는 거의 언제나 숨겨지게 마련이다.개개의 행위에 대한 판단의 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자기 살해를 거침 없이 자살과 동일시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태도일 것이다. 배타적이고 의식적으로 자기 개인을 고려하고 취해진 행위에서만 자기 살해는 자살이 된다.

14. 어떤 죄수가 고문 때문에 자기 민족이나 가족 혹은 친구를 배반할까봐 자살한다면, 혹은 어떤 정치가가 적 앞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한다면, 그 행위는 자기 희생의 동기를 강하게 가지는 것이므로 비난받을 행위로 취급하기는 불가능하다.

15. 어떤 불치의 환자가 자기 가족의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에도, 그런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많은 의혹이 있겠지만 비난을 퍼 부을 수 없다.

16. 초대 교부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여성의 순결이 폭력에 위협 당하는 경우에 자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17.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 금지를 절대화했다.

18.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여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배가 침몰할 때 구명선에 타인을 태우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크리스천이나, 날아오는 탄환으로부터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대신 그것을 맞는 크리스천의 경우.

19. 물론 개인의 부상이나 성적인 부도덕, 경제적 파산, 도박이나 개인의 과실 등이 가장 큰 동기가 되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불신앙이 가장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자살자는 하나님이 좌절된 삶에도 다시 의미와 권리를 줄 수 있고, 바로 그 좌절을 통해서 인생은 비로소 그 본래의 충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자살의 권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만 부정된다.

20. 자신의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증오와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해 가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태도, 거기서 나오는 비애, 모든 생명의 의미에 대한 의심과 회의 등은 기독교인을 심각한 위험의 순간으로 몰아 넣는다.그와 같은 시련에서 자살을 막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총의 위로와 형제적 기도의 힘 뿐이다.

21. 생에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 아래 다시 사는 것을 허락하는 은총이얌라로 자살의 유혹에 항거하게 한다.

22.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이러한 심각한 시련에서 실패한 인간(=자살자일 듯)까지도 포옹하고 붙들어 줄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III. 아돌프 슐라터

독일의 신학자 아돌프 슐라터는 Christliche Ethik, 1914, 338f에서 자살을 금지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자기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과 반대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자기 생명을 임의로 처분하여 자신에게 할당된 운명에 대해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IV. 칼 바르트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제 III권 §55 “생명을 향한 자유”의 2번 항목에서 자살 문제를 다루었다(영역판은III:4, 403-410). 다른 신학적, 신앙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역시 이 문제도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진지하게 길게 다루고, 다양한 사람을 인용하고, 또한 성경을 주석해서 논의를 전개해 간다. 그는 본회퍼의 견해를 여러 면에서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발전시켜 자기 주장을 펼쳤다. 간략하게 요약한다.

1. 자살자의 상황과 고통을 아무도 이해할 수는 없다.

2. 경솔하게 임의로 계명을 어기면서 자신에 대한 주권을 찬탈하여 스스로의 생명을 파멸로 몰아갈 때, 자살은 단순한 자기 죽음(self-kill)이 아니라 자기 살해(Selbsttotung, self-murder)이다.

3. 죽고 싶은 욕망이 신앙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빌립보서 1:23에서 이 생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좋다고 표현하고 있다.

4. 자기 칭의(본회퍼의 용어), 자기 성화, 자기 영화는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살의 경우에도 이를 용납할 수 없다. 칼빈이 말한 바대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Nostri non sumus sed Domini).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스스로 취함으로써 자기 파멸에 이르는 것은 분명히 자기 살해다. [“따라서 죄이고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

5. 그러나 우리가 자살을 금지시킨다고 해서 자살이 용서 받지 못할 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 말고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취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경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전체 생애를 보시면서 그 경중을 달아보신다. 하나님은 중심을 판단하시며, 자신의 자비로운 의로우심에 따라 심판하신다.

6. 생명을 자기 맘대로 써 버리는 인생에 대해서도 용서가 있다면, 왜 자살에 대한 용서가 없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 다음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살이란 것은 자비로우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살을 용서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고 반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7. 자살은 죄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자유이므로 자살할 자유는 없는 것이다.

8. 자살자는 항상 겁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살아있는 자들 중에 겁쟁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9. 삶의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하나의 빛이 있으니, 그것은 “너는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너는 살 수 있다.”는 허락이다. 모든 삶은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주어져 있음을 명심하라.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다. 그것을 우리가 원할 수 있음은 그것을 이미 허락 받았음을 뜻한다.

10.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 가운데 이 생명을 허락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며, 따라서 그의 천사들이 우리를 지켜주며, 꺼지지 않고 무제한적이며 신뢰할 만한 용서와 도움과 희망이 있음을 뜻한다.

11. 성경에 자살금지 명령이 명백하게 나오진 않지만 그런 명령의 방식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세 가지 중요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사울과 아히도벨과 가룟유다의 예가 그것이다. 이 세 명 모두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과 언약을 거부한 자들이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자들이다. 특히 유다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총을 거부하고, 자기 영화에 빠졌던 자로서 신약에서 가장 사악한 죄인이 되었다. 이 세 명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과 신실함을 조롱한 이스라엘인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세 명은 모두 자기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며 주인이 되려고 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12. [본회퍼가 하나님의 법정에서만 자실이 금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면 바르트는] 자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아래에서 자살은 금지된다고 주장. 창조자요, 공급자요, 생명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이 “예”라고 하신 그곳에서, 우리 인간이 “아니오.”라고 할 수는 없다. 복음만이 자살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13.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신자보다 더 많은 자살율을 보인다. 그것은 자살 문제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고압적인 태도와 –프랑스를 제외한-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사회학적인 구조에 기인한다.

14. 자살율은 남자가 여자보다 3-4배, 지식인이 비지식인보다, 도시인이 비도시인보다, 여름이 겨울보다,게르만족이 로망스족이나 슬라브족보다 더 높다.

15. 자기 파멸이 자기 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자기 드림의 형태이다. 즉 로마서 12장 1절이 말하는대로 하나님께 산 제사로서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16.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동정녀에 대하여』(De virg.) III.7에서 순교를 찬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I. 16-27에서 자살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특히 20-21을 보라. 성염 역, 176쪽의 한 구절을 내가 인용, 번역함. His igitur exceptis, quos vel lex justa generaliter, vel ipse fons justitiae Deus specialiter occidi jubet; quisquis hominem vel se ipsum, vel quemlibet occiderit, homicidii crimine innectitur. [성경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정의로운 법이 일반적으로 죽이라고 명령하거나, 정의의 원천인 하나님이 특별하게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사람을 죽일 때에는 자기 자신이든 남이든 살인죄를 짓게 된다.]

17. 만일 어떤 자가 하나님의 명령 없이 자신을 죽인다면, 그의 행위는 살인이 된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실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살인자이다. 그리하여 그가 만일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라고 한다면 머리를 들고서 통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18.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히틀러’(파괴적 본성)를 없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