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braly/이것 저것 관심사

자살과 교회의 대책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자살과 교회의 대책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발표일 : 2004. 09. 13. 


들어가면서


   20세기의 한국의 특징들을 묘사하는 표현은 실로 다양하다. 한국은 여러 방면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빠른 성장을 일구어낸 나라로 국제사회에 각인되어 있다. 교회의 부흥속도에 있어서나, 경제발전의 속도에 있어서나, 인터넷보급속도에 있어서나, 휴대폰보급속도에 있어서 한국은 세계 최정상급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이와같은 긍정적인 단면들의 빠른 성장과 더불어 부정적인 단면들의 빠른 성장에 있어서도 한국은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위치해 있다. 부정적인 단면들이란 사회의 도덕성의 퇴락을 뜻한다. 한국은 사회의 도덕성의 붕괴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진행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모든 국가들 가운데서 최초로 인간배아살해를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가 되었으며, 낙태시술이 광범위하게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20명이 넘는 여인들을 토막살해하고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당당하게 밝히는 살인범에게서,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구를 때려 숨지게 해놓고도 아무런 죄의식없이 담담하게 진술하는 여학생들에게서 우리는 생명윤리가 땅에 떨어져 가는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이런 많은 현상들 가운데 사회의 도덕성의 붕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는 유례없는 자살률의 급증을 들 수 있다. 자살률의 급증은 통계상으로도 분명히 파악되었다. 경찰청의 통계연감에 의하면 1993년의 자살자의 숫자가 7,608명이었던 것이 10년이 지난 2002년에는 13,055명으로 2배가 증가되었다 (하상훈 2004, 71). 그러면 어떤 이유로 인한 자살이 이와같은 자살률의 급격한 증가를 견인(牽引)해냈는가? 근래 십년간에 걸쳐서 일어난 자살률의 급격한 증가에는 실로 다양한 이유들이 전방위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세가지 이유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1991년에서 2000년까지의 매년 자살률의 변동을 조사한 통계청 자료에 보면 1998년도에 자살률이 절정에 달했고, 같은 기간동안의 남성과 여성 자살률을 비교분석한 통계에 의하면 1998년도에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자살률의 3배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준필 2003, 26-27). 1997년에 IMF사태가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이 수치는 가장의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곤경이 자살률 증가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1997년에 경제위기를 겪었다는 말은 이 해를 전후하여 그 이전 5-6년이상, 그리고 그 이후 5-6년 이상 경제적 곤경이 가장 큰 사회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고, 자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어 왔음을 반증한다. 실제로 최근 10년간에 걸쳐서 일어난 자살사건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경제적 곤경으로 인한 생계유지의 어려움이었다. 남편이 실직하여 생계를 꾸려갈 길이 막막해지자 집나간 남편을 대신하여 가까스로 생계유지를 위하여 몸부림치던 아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아이들과 함께 자살하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보도되었다.


   둘째로, 1991-2000년까지의 연령별 자살률에서 확인되는 두드러진 변화는 65세 이상의 노인인구의 자살률이 1992년의 비율에 비하여 2배 이상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조준필 2003, 27). 노인인구의 자살률증가는 가정이 전반적으로 핵가족화되고 자식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전통적인 윤리관념이 후현대주의적 규범해체를 겪으면서 퇴보하고, 사회전체가 유물론사상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재의 쾌락향유를 절대적인 가치로 중시하게 되고, 이에 따른 노인부양비용의 부담 등으로 인하여 경제력을 상실한 노인들이 가족간의 유대관계도 박탈당하자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한 채 자살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셋째로, 1995년경부터 15세에서 19세까지의 십대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변화로 지적될 수 있다 (조준필 2003, 27). 다른 연령층의 사망자 비율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이 9,10위인데 비하여 청소년층의 사망자 비율에서는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이 2-3위를 차지하고 있다 (김순애 2003, 46; 이원규 2003, 39). 한국사회에 있어서 청소년 자살의 가장 큰 이유는 학교성적과 관련되어 있다. 청소년의 능력에 대한 모든 평가가 학교성적에 근거하여 획일적으로 평가되는 경쟁사회에서 성적이 부진할 때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관심권 밖으로 멀어져 버린다는 소외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발견할 수 없는 절망감이 성적이 부진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청소년들을 자살의 질곡으로 몰아넣고 있는 실정이다. 빈곤, 소외감, 사회의 비인간성과 희망의 상실 등의 요인들이 지난 십년간의 자살률 변동의 동인들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요인들이 이전에는 중심적인 자살의 요인들로서 역할을 하지는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가난은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고, 소외감은 자기발전을 위한 창조적 계기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냉엄한 사회현실은 더욱 정신차리고 긴장하여 살아가도록 자극했으며,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했었다. 그러던 이유들이 이제는 자살의 사유들로 둔갑해 있다.2)


   게다가 자살률의 증가가 특별히 교회에 더욱 심각한 문제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평소에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해 오던 기독교인들의 자살사례가 표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성적비관으로 자살한 아들을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아들 뒤를 따라서 자살한 사건이 보도된 일이 있다. 유럽의 어느 교포 여인은 딸이 명문 의대 본과로 바로 진급되지 못하고 유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머지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이 여인은 신실한 교회 신자였다. 중학교에 다니는 어느 소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사실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잔디밭에 떨어져 다리만 부러진 채 목숨을 건졌다. 이 소녀는 교회 중등부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아이였다. 미국의 어느 교포집사는 아내와 늘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느날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운행하던 중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아 자살했다. 이런 일들을 볼 때 이제 교회도 자살문제를 공론화하여 본격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자살이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 행동을 뜻한다.3) 그러면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 모든 행동은 윤리적으로 부당한 행동인가? 윤리적 문제로서의 자살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자살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어 다루어지고 있는 행동들에 대한 좀더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우선 자살은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목숨을 종결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직접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목숨을 종결시키는 상황을 맞이하여 그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고 맞이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 죽이는 행동이 사람에 의하여 수행되었다면 이 행위는 명백히 타살이다. 우선 이 구분에 대하여 지적해두고자 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자기 손으로 종결시키는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두 번째 경우는 자기 목숨을 종결시킨 원인이 외부적인 요인이긴 하지만 그 요인을 피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해가지 않은 것이므로 자신의 목숨을 종결시킨 행위에 대한 책임을 첫 번째 경우와 같이 본인이 담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목숨종결의 원인이 본인의 결단에 있다는 점에서 두 경우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이든 두 번째 경우이든 중요한 것은 본인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한 행위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본인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한 행위가 아닌 경우, 예컨대 우울증이나 치매와 같이 자유로운 결단을 행사할 수 없는 정신질환에 걸린 상태에서 행하는 병적인 자살의 경우에는 윤리적인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이 분명한 경우에는 윤리적인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이 경우는 정신질환의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정신질환의 치료를 재정적인 면에서와 간병의 차원에서 간접지원하는 일과 정신질환의 원인이 된 환경들을 개선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자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 명백한 자살이든, 아니면 자기 목숨을 타살이나 기타 죽음의 원인에 내어주는 행위이든 - 죽음에 이르는 행위는 모두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경우에는 결단의 동기 또는 결단을 하게 만든 목적이 무엇인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동기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명되어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이라 할찌라도 동기나 목적이 정당하면 윤리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동기나 목적이 선하면 모든 자살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경우에는 동기나 목적이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기독교윤리학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규범적 근거로는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하는 경우이다. 주님께로 가고자 하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눅14:26).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빌2:30).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롬14:8). 이 말씀들에 근거하여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보전하는 길을 포기하고 목숨이 희생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교자들의 행동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목숨을 스스로 끊도록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켜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고행을 짊어진다는 의미에서 죽음에 몸을 내맡길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교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것이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데도 고행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맞이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경우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요15:1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동역자인 바울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롬16:3).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행동은 기독교인들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행동을 요청하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요일3:16). 이 말씀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로 일단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살은 생명을 버리는 행동이므로 자살을 결행하는 목적이 생명의 희생을 상쇄할만큼 가치있는 것인가를 공리적으로 계산해 보아야 하며, 불가피한 수단이었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자기목숨을 버리는 행동들 가운데는 자기의 손으로 직접 목숨을 끊는 행동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면 정확하다.


   a. 타인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방법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을 경우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사병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상태로 떨어뜨린 수류탄 위에 자기 몸을 덮쳐서 폭사(暴死)하고 수많은 사병들의 생명을 살려낸 강재구소령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어느 군목은 전쟁포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송되어 가던 중 파선을 맞이했다. 구명보트가 내려졌는데, 이 구명보트의 승선허용인원이 승선해야 할 사람들 숫자에 비교하여 볼 때 한 사람이 모자랐다. 군목은 다른 전쟁포로들을 다 태우고 자신은 바다에 뛰어내려 파도속으로 사라졌다 (Douma 1984, 95; 1983, 127vv). 이 군목의 자살행동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b.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투를 중단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죽음의 가능성이 충분하게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전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조국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총탄이 난무하는 전선에 뛰어드는 행동은 비록 구해야 할 특정한 사람의 생명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삼손이 다곤신당을 무너뜨린 행동도 이 범주에서 정당한 행동으로 판단할 수 있다 (삿16:23이하). 더욱이 삼손의 행동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이후에 한 행동으로서(삿16:28), 히브리서 기자로부터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행동으로 평가받았다 (히11:32-34) 는 사실은 삼손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c. 우리나라의 운동권에서 열사(烈士)로 추앙되고 있는 전태일의 분신자살이나 월남전쟁 당시에 월남정부의 부패에 항의하는 표시로 승려들이 분신자살한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정치적인 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치적 이념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 할찌라도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요구할 만큼 가치있는 것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체로 정치적 이념들은 인간과 사회를 증진시키기 보다는 그것들이 지닌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에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심각한 해독을 끼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d. 순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순결이 소중한 가치이긴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만큼 무거운 가치는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e.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이나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가족에게 안겨주고 가족들의 희생적인 간병이 필요한 환자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살을 시도할 수가 있다. 이 경우는 가족들이나 이웃들이 관심과 사랑을 통하여 자살을 결행하고자 하는 당사자가 공동체의 없어서는 안될 일원임을 인식시켜주고 포용하는 태도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f. 폭력조직과 같은 비윤리적인 조직에서 조직의 보스나 조직 그 자체를 보호하고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뒤르껭과 프로이드의 분석의 공헌과 한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자유로운 결단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주어진 요인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도 하는 존재다. 이 요인들은 두가지 유형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공간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사회적 요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적으로는 한 개인의 내부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통제가 쉽지 않은 요인들이다. 특히 자살과 같은 비상한 행동을 결행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살결행자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자살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을 분석하는 작업은 자살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살을 하도록 추동하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수행한 학자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에밀 뒤르껭(Emil Durkheim) 과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를 들 수 있다.


   에밀 뒤르껭은 자살의 유형을 세가지로 구분했다 (Durkheim 1994).


   a.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사회와의 통합의식이 약화되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결행하는 자살의 유형이다. 이 유형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집단으로 따돌림을 당하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b.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사회에 대한 통합의식이 너무나 견고할 때 결행되는 자살이다. 예컨대 2차대전 당시에 패전에 몰린 일본군이 미국군함과 항공모함을 향하여 감행했던 가미가제 자살특공대라든가, 이슬람의 종교 및 국가 공동체에 대한 집착적인 헌신 때문에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알 카에다 요원들이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요원들, 짐 존즈가 이끌었던 인민사원 신도들의 집단자살 등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c. 몰가치적 상황으로 인한 자살. 이 유형의 자살은 종교와의 관련이나 직업 및 결혼규범이 약화되고 경제공황이나 실업률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사회의 규범적 통합력이 약화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을 뜻한다.


   뒤르껭이 지적한 요인들 - 소외감과 이로 인한 고독의 감정, 공동체에 대한 지나친 이념적 집착, 윤리적 규범의 약화 등은 사람들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적 이유들로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사회적인 요인들의 완화 내지 제거에 교회의 자살예방대책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요한 점은 이런 요인들이 자살에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게 할만큼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요인들로서 작용하고 있고, 따라서 이런 요인들이 자살자의 환경적 배경에 자리잡고 있을 때 자살은 불가항력적인 행동인가 하는 것이다. 뒤르껭의 자살론은 뒤르껭 자신이 자살을 추동시키는 원인으로서 지적한 사회적 상황안에서 오히려 삶에의 의지를 불태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예컨대, 학교생활에 무리없이 적응하는 모범생들은 집단에 강하게 귀속되는 것을 싫어한다. 어느 정도의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훌륭한 학교성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외와 고독을 오히려 창조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는 학생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집단에 강하게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공동체를 위한 자살로 항상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자살로 귀결되는 강한 결속력을 요구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비판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뒤르껭이 지적한 규범의 약화가 자살의 원인이 된다는 분석은 의미있는 분석이다. 그러나 뒤르껭의 분석내용 가운데 경제적 공황상태나 실업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에 사람은 규범으로부터 느슨해진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규범적으로 느슨했던 생활태도를 다잡고 한층 더 도덕적인 태도로 위기를 극복해 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교회와 기독교신학이 뒤르껭의 자살원인분석과 관련하여 해야 할 작업은 두 방면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뒤르껭이 지적한 요인들의 완화 내지는 제거를 위한 실천적 노력은 뒤르껭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교회는 인간에게는 뒤르껭이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적 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성경에 근거하여 증명하고 주지시켜야 한다. 인간은 현실세계 속에서 어떤 경험을 통하여 지식과 능력을 배양받기에 앞서서 선천적으로 도덕적인 능력을 이미 부여받은 존재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 (창1:26-27) 가 가지는 많은 의미들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자기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 정신질환이 원인이 되어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가 아닌 한 자살이라는 행동은 본인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행해진 행위인 것이다. 게다가 모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마음 속에 도덕적 판단의 능력과 도덕법이 심기워져 있다 (롬2:14-15). 개인의 요구권이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생명 소유자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는 자결권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자결권보다 더 근원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사람이 자의적으로 종결시키는 행동이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는 인식은 자결권보다 우선하는 선천적인 마음의 도덕법이 제시하는 규범이다. 자살의 유혹에 직면한 모든 인간들은 자살이라는 행동이 그의 마음의 도덕법에 부합하는 행동인가를 물어야 하며, 스스로 선택을 하고 선택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살을 선택해서는 안되는 근거들이 한층 더 강력하게 주어진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한층 더 명료한 규범인 “살인하지 말라”는 규범이 회피할 수 없을만큼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으며, 그의 마음 속에는 성부 하나님의 영과 성자 하나님의 영과 성령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고 계시는 바(롬8:9), 삼위 하나님의 영, 특히 기독교인들의 성화사역을 주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령을 구하는 자가 어떤 어려운 결단의 순간에도 바른 결단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신다. 삼위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는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망조차도 끊을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인들을 하나님과 연합시켜 놓았다 (롬8:34-39). 이와같은 근거들은 기독교인이 자살을 결행해서는 안될 넉넉한 근거로 작용한다. 기독교인들의 자살은 이와같은 성경적인 근거들을 충분히 깨닫고 경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드 (Freud 1997) 는 인간의 삶은 두 개의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영위되는 바, 하나는 삶에의 충동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에의 충동이라고 보았다. 이 중에서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누르고 힘을 얻고, 이 충동이 내면을 향할 때 자기파괴가 나타난다고 한다. 자기파괴는 협착화된 엄격한 양심의 결과이며, 이때 무거운 자기죄의식이 수반되는 우울증이 나타나며 이 우울증이 자살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에의 충동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죽음에의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았던 엘리야가 그랬고 (왕상19:4), 욥이 그랬으며 (욥3장, 특히 21절), 요나가 그랬다 (욘4:3).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과 동등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프로이드는 죽음에의 충동과 삶에의 충동이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것은 프로이드의 인간학이 가지는 치명적인 실수다. 기독교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삶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는 주어졌지만 (전3:11), 죽음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가 주어졌다고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현실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외부로부터 들어온 낯선 침입자이며, 따라서 죽음에의 충동도 외부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력한 힘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충동이요, 본원적인 충동은 아니다. 죽음에의 충동은 반드시 그 충동을 유발한 외적인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이 원인이 제거될 때 이 충동도 눈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통례다. 정신의학은 “잠복해 있던 자살에의 충동 -> 내외적인 환경이 가하는 충격에 의하여 깨어남 -> 자살결행”으로 설명하지만 경험적 관찰은 “자살충동과는 무관한 외부적인 충격 -> 충격을 극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의 자살”이라는 도식이 정확한 도식임을 보여 준다 (이상원 2002, 237). 죽음의 충동이 본능적인 충동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잠정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찾아드는 충동임을 강조함으로써 자살은 얼마든지 상담과 설득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일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교회의 자살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철학적 자살관의 한계


   규범의 통제가 느슨해질 때 자살에의 유혹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뒤르껭의 분석은 타당하다. 따라서 자살의 예방대책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의 통제의 회복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상 모든 철학과 종교가 윤리적인 규범을 제시해 왔고, 이 안에는 자살에 대한 규범적 판단도 포함되어 있는데, 철학과 타종교의 자살규범들은 자살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가? 기독교는 철학과 타종교들이 제시하는 규범적 판단에 비교할 때 자살행위를 견제하는데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는가?


   먼저 철학에서 제시하는 자살에 대한 견해들의 핵심을 개관해 보자 (Monestier 2003, 455-81; Douma 1984, 67-69). 희랍신화에서는 자살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묘사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헤라클레스는 불로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신들이 사는 올림푸스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작고 하얗고 작은 마른 열매를 맺던 나무딸기가 피라모스를 잃고 절망한 티스베가 나무딸기 앞에서 자살했을 때 크고 붉은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이라든가, 두 연인의 자살에 감동한 신들이 두사람을 두개의 큰 강으로 바꾸어 주었다든가, 일곱명의 히아데스 자매들의 자살로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히아데스 성단이 탄생했다든가, 자살한 괴물이 스핑크스가 된 예 등은 희랍신화의 시대에 자살이 예찬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Monestier 2003, 456-57). 희랍신화가 자살을 예찬한 것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을 비판했다. 신들이 인간들을 보호하며 인간들은 신들이 소유한 목장에 속한 가축들이라고 본 플라톤은 가축 가운데 일부가 자살을 하는 것은 신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신의 명령이 아닌 한 자살은 해서는 안되었다 (Plato 1956, 62b and c). 소크라테스의 독배사건에서처럼 형벌의 일환으로 자결을 명령할 때는 자살이 허용되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은 공동체인 도시국가에 대항하는 행동이라는 이유로 자살을 반대했다 (Aristoteles 1947, V.15).


   개인의 판단에 따라서 현인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봄으로써 자살을 옹호했던 견유학파의 입장은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로스학파에게 전승되었다. 모든 형이상학을 부인하고 인간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스토아학파는 삶과 죽음의 문제도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 곧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보았다. 스토아학파에게는 만일 삶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살을 선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에피큐로스는 타인이나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와 즐거움을 향유하는 삶을 최고의 가치있는 삶으로 보았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멸망하는 것이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삶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다면 자살로써 삶을 끝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Monestier 2003, 459-63).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자살은 몽테스키외, 루소, 흄, 괴테, 쇼펜하우어, 니이체 등에 의하여 자결권의 차원에서 옹호되었다. 단 칸트는 두가지 논증에 근거하여 자살을 반대했다. a. 네가 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법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일반적인 자연법은 생명을 증진시키는 것인데, 자살은 일반적인 자연법이 될 수 없지 않은가? b.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 이 원리에 따라서 생각해 본다면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한다는 것은 고통을 피한다는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Douma 1984, 77-78).


   이상에서 간략하게 개관한 철학적 윤리학의 자살관은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플라톤) 또는 암시적으로(칸트)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고, 보편적 도덕률을 강조하는 의무론적인 입장이든지, 아니면 공동체의 공동선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살이 거부되고 있는 반면에 보편적인 규범이나 공동선 보다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나 자결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살이 폭넓게 허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철학적 토론의 마당에서 자살에 대한 어떤 합의점을 도출해내기란 극히 어렵다.


   그러면 기독교는 자살에 대하여 어떤 규범적 판단을 하고 있는가? 교회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일이 거의 없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17)는 자살자를 살인자로 정죄했다. 인간이 세상에 온 것이 자의로 온 것이 아니라면 세상을 떠날 때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만 떠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Lactantius 1964, III.18). 어거스틴은 자살은 육체를 더럽히는 행동이 아니라 영혼을 더럽히는 행동으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리스도께서도 핍박을 받을 때 도시들을 피해 다니라고 말씀하셨을 뿐 자기 목숨에 손을 대라는 명령을 주시지는 않았다. 적의 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서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자살은 해서는 안되었다 (Augustinus 1992, I.17-27).


   중세시대에는 자살자의 매장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자살에 데한 거부감을 표현하였으며, 693년의 톨레도회의에서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부지불식간에 자살한 자를 제외하고는 자살한 자에 대한 중보기도를 금지시켰다. 교황 867년경 니콜라스1세는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라고 선언했다. 중세시대의 자살에 대한 비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정리되었다 (Aquinas 1975, Question 64, Article 5, 31-36). 아퀴나스는 자살은 세가지 관점에서 범죄임을 지적했다. a. 자살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연적인 성향에 대항하는 범죄다. b. 인간은 공동체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소유물을 자의로 손대는 행동은 공동체에 대항하는 범죄행위다. c. 자살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죄다. 인간의 소유자는 하나님이므로 자살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자신을 탈취하는 행동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자살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일관성있게 거부되었으나, 루터나 퍼킨스 등은 자살이 구원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Douma 1984, 73). 아메시우스(1576-1633)는 자살을 극히 심각한 죄로 규정한 후에 정의의 명령에 따라서 자살하는 경우, 예컨대 국가기관이 형벌로서 자살을 명령하는 경우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경우나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주는 경우에는 자살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자살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의하여 고통받는 경우로 간주되었다. 삼손의 행동은 이런 관점에서 정당화되었다. 해전을 벌일 때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하여 배에 불을 질러 적함에 돌진하는 행위는 죽음이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푸치우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삼손의 행동을 일반화된 모범으로 제시할 수 없으며, 적에게 상해를 입힌다는 목적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Douma 1984, 73-75).


   그러면 자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규범적 판단을 하고 있는가? 우선 우리를 당혹케 하는 사실은 성경은 자살이라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하여 어떤 형식으로든 직접적인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자살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이 몇군데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자살행위 그 자체에 대한 평가를 제시하시지 않는다. a. 이미 지적한 것처럼 삼손의 경우는 윤리적으로 부당한 자살행위로 비판받지 않았다. b. 사울이 몸에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을 입고 패전했을 때 자기 칼에 몸을 엎드려 죽은 경우(삼상31:3-4;대상10;3-4). 사울은 이방인에게 찌름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성경은 이 경우에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한 데 대한 형벌로서 찾아온 것임을 분명히 할 뿐(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방식에 대해서는 논평하지 않는다.4) c. 아히도벨의 경우(삼하17:23). 아비도벨은 자신이 압살롬에게 건의한 전략이 채택되지 않고 다윗의 사람인 후새가 건의한 전략이 채택되자 목매달아 죽었다. 이 행동은 명백한 자살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경우에도 자살 그 자체에 대해서는 논평하지 않는다. d. 시므리의 경우(왕상16:18). 이스라엘왕 엘라에 대항하여 반역한 시므리는 반역에 실패하자 왕궁에 불을 놓아 자살했다. 이 경우는 명백한 자살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경우에도 자살 그 자체에 대하여 논평하지 않는다. e. 유다의 경우는 명백히 자살행위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성경은 자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는다.


   성경이 자살에 대하여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이 자살을 죄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이 자살에 대하여 특별히 논평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살은 제6계명을 어기는 행위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목숨을 종결시키든 아니면 자기자신의 목숨을 종결시키는 행위이든 하나님의 형상에 중대한 손상을 가하는 행위이자(창9:1) 하나님 한 분만이 절대적 소유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소유물(시24:1)을 자의로 탈취하는 행동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신32:39; 삼상2:6). 생명의 존속여부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기독교윤리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종말론은 자살을 거부하는 기독교윤리학의 입장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자살에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태도를 뒷받침하는 세계관적인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같이 소멸되어 없어져 버린다는 종말론이다. 영혼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영혼이 소멸되어 버린다고 믿고 있는 이상 현세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 문제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와같은 종말론에 대응하여 기독교종말론은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하여 존속함을 일관성있게 주장한다.5)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하여 존속하는 영혼은 자신이 행한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한다.6)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는 자들에게 윤리적 규범과 바른 기독교적 종말관과 인간관을 교육시키는 일은 자살의 예방을 위하여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연대성의 실천


   어떤 이유로 자살을 하든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모든 자살행위의 배후에는 외로움이 깔려 있다. 사랑을 얻는데 실패한 자는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는 것이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학생이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는 것도 자기자신을 인격적으로 따뜻하게 보듬어 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 때문에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는 것이며, 경제적 빈곤으로 인하여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곤경을 사랑을 가지고 보살펴 주지 않고 자신들을 사회의 삶의 무대로부터 밀려 나도록 방치해두는 사회를 향하여 원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노인이나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고자 할 때도 그의 속마음에는 자신을 공동생활의 일원으로 받아 주려고 하지 않는 가족들을 향한 섭섭함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자살충동을 느끼는 자들이 겪는 외로움을 완화시켜 주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같이 나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자살의 예방과 대책마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독교인들은 이중적인 연대성 안에 위치해 있다. 육체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인류공동체적 차원에서 연대성 안에 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는 바울의 설교처럼(행17:26) 모든 인류는 아담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아담의 자녀들로서 한 핏줄을 나눈 하나의 인류가족의 일원이다. 따라서 인류의 문제는 나의 가족의 문제가 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라고 물으신 물음은 가인과 아벨의 연대성을 인식할 것을 요청하는 물음이다. 가인과 아벨이 연대관계 안에 있다는 말은 곧 모든 인류가 연대관계 안에 있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의 책임을 아담과 하와에게만 묻지 않으시고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온 인류에게 물으신 것은 온 인류가 하나의 가족으로서 슬픈 일과 기쁜 일을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유기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적 연대성 안에 있다(고전12:12-31). 이와같은 이중적인 연대성의 인식과 실천은 자살의 예방과 대응방안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연대성의 실천방안으로서 몇가지 조치들이 제시될 수 있다.


   a.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빈곤한 이웃들을 찾아서 경제적 재화를 나눔으로써 경제적 빈곤으로 인하여 자살에의 충동에 내몰리고 있는 이웃들을 실질적으로 돕고,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증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재화의 나눔은 두가지 방면에서 시행될 수 있다. 하나는 교회가 일정한 구제기금을 조성하여 교회 안팎에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서 돕는 구제의 실천이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다른 기관들과 연대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생계유지가 어려운 국민들의 최저생계비를 지원하는 견실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형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야고보가 지적한 것처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이르러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경건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약2:15-16).


   b.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자살의 충동을 실질적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복음의 소개와 상담을 통하여 자살에의 충동을 벗어나게 하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운영하는 일에 인력과 재정을 실질적으로 투입하는 실천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자살예방센터인 ‘생명의 전화’와 같은 네트워크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c.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바른 복음의 터 위에서 훈훈한 사랑을 서로 나누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형성해가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자살문제해결에도 중요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으로 사랑하고 품에 안아 주시며, 믿는 자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항상 동행하시면서 많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서로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을 교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고, 교회는 힘들고 고달픈 삶에 지친 자들이 언제든지 찾아가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 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는 자들이 자살을 결행하기 전에 교회를 찾아와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살자의 구원에 관련된 문제


   기독교인들의 자살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자살이 심각한 윤리적인 죄로 비판받게 되자 자살자의 구원문제는 교회가 시급하게 답변을 주어야 할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자살자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신앙고백이 있었다 할찌라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상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뇌리에 깊게 새겨지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오해가 깔려 있다. 첫째로, 자살행동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다. 둘째로, 다른 죄는 범하고 난 이후에 범한 죄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이 있는 반면에 자살한 죄에 대해서는 회개할 시간이 없다. 셋째로, 진정한 신앙고백을 한 기독교인은 자살이라는 행동을 할 리가 없으며, 자살을 한 사람이라면 그의 신앙고백이 진실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넷째로,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자살충동을 쉽게 느끼는 청소년들이 자살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 그러면 자살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정당한 것인가?


   첫째 문제는 자살은 성령훼방죄인가 하는 것이다. 자살이 성령을 훼방한 죄라는 견해는 중세시대에 형성된 견해이며, 개혁자들은 이 견해를 비판했다. 루터는 자살자가 확실히 구원을 잃는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Douma 1984, 73). 푸치우스도 모든 자살자가 영원히 구원을 잃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자살을 성령에 대항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라고 보았다 (Douma 1984, 76). 사실상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12:31; 막3:28,29)는 히브리서10장29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적인 행동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다. 죽을 때까지 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채 죽음을 맞이하면 그 후에는 영원히 돌이킬 기회가 없다. 자살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관련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둘째로, 다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가 범한 죄를 회개할 시간이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살이라는 죄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구원은 인간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한 공로를 근거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만일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맞아서 회개할 시간을 갖지조차 못한 채 폭사한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많은 신자들은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과거에 범한 죄가 죄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신자들이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이 신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신자의 삶이 값없이 오직 은혜로 중생함으로써 시작되었다면,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것도 값없이 오직 은혜로 영화됨으로써 구원받을 뿐이다.


   셋째로, 구원받은 신자들이라 할찌라도 자살에의 충동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의 중생의 상태를 너무 이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엘리야, 욥, 요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죽고 싶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자들도 자살에의 충동을 느낄 수 있으나, 믿음 안에서 넉넉히 극복할 뿐이다. 자살은 분명히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여 자살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평가할 때 자살을 결행한 그 한 순간의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에 내모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 한 행동을 가지고 다윗을 규정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과 다윗의 삶 전체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평가하실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하갈을 취한 한 사건에만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평가하지 않으셨다. 자살자도 마찬가지다. 수십년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를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 그 순간만 가지고 단죄해서는 안된다. 넷째로, 청소년들에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된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청소년들을 설득하여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성적이나 가정불화나 실연 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배려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면서 자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선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살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가르침은 중세말기 로마 카톨릭의 복음왜곡과 교회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서 악을 행하는 것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을른지는 몰라도 이 때문에 사람의 영혼의 운명을 결정짓는 복음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공로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이를 이용하여 돈을 주고 구원을 사고파는 면죄부파동까지 일어났다. 교육적 효과는 복음과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도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교회는 자살한 성도가 자살 때문에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루터는 자살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평민들에게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더욱 더 많은 살인을 자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Douma 1984, 73). 공예배 석상에서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것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에만 근거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자살한 가족을 가진 성도들이 자살한 가족이 죽은 후에 간 길에 대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개인적인 상담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한 신자라면 사망을 포함한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면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는 급증하는 자살률이 보여주듯이 자살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반적인 방편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심각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 현실을 맞이한 교회는 교육과 실천의 두 전선에서 자살을 예방하고 자살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육의 차원에서 교회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자유로운 도덕적 결단을 할 능력이 있으며, 마음에 심기워진 도덕법에 근거하여 자살이 잘못된 관행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자살충동요인들에 운명적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아니라 이 요인들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자들임을 아울러 강조해야 한다. 인간에게 삶에의 본능적 욕구는 있지만 죽음에의 충동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더우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백한 성경의 법이 있고, 성령의 권능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살에의 충동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자들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교회는 자살충동을 유발하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을 실질적으로 제거 내지 완화시키기 위한 실천적이고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구제기금을 조성하여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돕는다든지, 사회안전망의 확보를 위한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든지, 자살충동을 느끼는 자들에게 상담을 통하여 위로하고 설득하는 상담네트워크를 강화시킨다든지, 자살결행자들이 언제라도 도움을 요청하고 참여하고 싶어 하는 복음의 위로와 사랑의 실천이 풍부하게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으며 사후에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한다는 준엄한 진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자살과 관련된 부당한 구원문제에 있어서 오해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는 일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순애.

2003. “자살예방을 위한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 [교육목회], 가을호, 통권 제18호: 46-52.

김인유.

2004년8월6일. “어머니 숨지자 40대 아들이 뒤따라 자살.”

http://news.media.daum.net/society/affair/200408/06/yonhap/v7148580.html

이상원.

2001년5월2일. “자살은 살인행위.” [기독신문], 제1343호: 7면.

2002. “신용카드에서 자살까지.” [목회와 신학], 7월호, 제157호: 234-39.

2003. “자살은 세계관의 문제다.” [교육목회], 가을호, 제18호: 9-16.

2004. “자살을 부추기는 문화.” [건강과 생명], 3월호, 제166호: 64-69.

이원규.

2003. “자살예방에 대한 교회의 역할.” [교육목회], 가을호, 통권 제18호: 59-66.

장영.

2004년8월21일. “인터넷 채팅서 만난 10대 3명 자살시도,한명 사망.

http://news.media.daum.net/society/region/200408/21/nocut/v7230106.html

조준필.

2003. “자살예방을 위한 담론.” [교육목회], 가을호, 통권 제18호: 25-30.

황보연.

2004년8월5일. “노부부와 손자 동반자살 기도”

http://news.media.daum.net/society/affair/200408/05/YTN/v7143748.html

하상훈.

2004. “생명의 끈잇기 운동.” [건강과 생명], 3월호: 70-75.

Aquinas, Thomas.

1975. Summa Theologiae, Vol. 38. New York: McGraw-Hill Book Company.

Aristotle.

1947. Ethica Nicomachea: Nicomachean Ethics. Trans. W.D. Ross. In Introduction to Aristotle.

New York: McGraw-Hill: 308-543.

Augustine, St.

1992. [하나님의 도성]. 조호연 · 김종흡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Barth, Karl.

1951. Kirchliche Dogmatik, III.4. Zuerich:

Douma, J.

1983. Verantwoord handelen. Kampen: Van den berg.

1984. Rondom de dood. Kampen: Uitgeverij van den berg.

1997. Medische ethiek. Kampen: Kok.

Durkheim, Emil.

1994. [자살론: 사회학적 연구]. 김충선 역. 서울: 청아출판사.

Freud, Sigmund.

1997.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박찬부 역. 서울: 열린 책들.

Kuitert, H.M.

1983. Suicide: wat is er tegen? Baarn.

Lactantius.

1964. The Divine Institutes, Books I-VII. Trans. Sister Mary Francis McDonald.

Washington: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Monestier, Martin.

2003. [자살]. 한명희 · 이시진 역. 서울: 새움.

Plato.

1956. Phaedrus. Trans. W.C. Heim. Indianapolis: Bobbes-Merrill.

 

 

1) 이 논문은 2004년9월13일 사랑의 교회 소망관 202호에서 가정사역아카데미가 개최하는 심포지움, “자살: 마지막 도피처인가?”에서 발표하기 위하여 준비한 글임을 밝혀 둔다.


2) 물론 현대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자살 문제는 위에 언급한 세가지 유형의 이유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방위적인 이유들에 의하여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최근에만 하더라도 노부부와 손자가 독극물을 마시고 동반자살한 사건이라든가 (황보연 2004년8월5일, v7143748), 병으로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한 아들이 죽은 어머니를 따라서 죽은 사례 (김인유 2004년8월6일, v7148580)라든가 이성문제로 고민하던 청소년3명이 물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다가 1명이 죽은 사례 (장영 2004년8월21일, v723016) 등이 연이어 보도됨으로써 자살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반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3) 자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suicide 는 1650년경에 라틴어 보다 먼저 형성되었다가 추후에 라틴어로 들어와서 suicidium 이라는 단어를 형성시켰다 (Kuitert 1983, 26).


4) 바르트는 사울의 자살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찾아오는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보았으나 (Barth 1951, 465v), 여기서 바르트는 지나치게 사색에 의존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항하는 삶이 반드시 논리적으로 자살로 귀결된다는 논증은 경험적으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항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도 자살로 귀결되지 않는 예는 너무나 많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자살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변적 판단 보다는 사울의 경우에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로 보는 것이 무리없는 해석이다.


5) 사후에도 영혼이 계속하여 존속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거들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a. 사후의 영혼이 그의 현세에서의 모든 일들을 기억한다. 부자와 나사로는 자신들이 현세 안에 있을 때 누구였고,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가를 안다(눅16장). 마지막 심판날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땅 위에서 한 일이 어떤 일들이었는가를 안다. 예컨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실을 예수님께 상기시킨다 (마7:22).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그들이 행한 일이 따라 온다는 말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한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다(계14:13).

b. 성경은 사후의 영혼들이 현세에서 안면이 있던 사람들을 알아본다고 말한다. 예컨대 바벨론의 왕 밑에서 섬기던 신민들이 지옥에 들어온 바벨론 왕을 알아보고 조롱한다(사14:10,11).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고(눅16장), 죽은 영혼으로부터 현세 안에서 선대를 받은 친구들이 그를 알아보고 영접한다(눅16:9).

c. 욥은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욥19:26), 육체적 죽음으로써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이후에도 영혼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혼이 감각활동을 계속하여 있음을 증거한다. 물론 사후 영혼의 감각활동은 육체를 입은 영혼의 감각활동과 같은 방식은 아니며, 활동의 구체적인 방식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감각활동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d.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누가복음16:19-31)는 사후의 영혼들이 살며 기억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도한다.

e. 바울이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빌립보서1장23절에서 한 말이라든가, 사후의 신자의 상태를 “주와 함께 거하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고후5:8)은 사후에 영혼이 의식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표현들이다.

f. 만일 인간의 의식적 활동이 중단되어서 영혼에 결핍이 생겼다면 히브리서12장23절에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의식적 활동이 더 예리해지고 완벽해져야 영들이 온전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g. 계시록6장9,10절에는 순교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만일 영혼의 의식이 죽었다면 어떻게 이처럼 기도할 수 있겠는가?


6)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는 말씀은 온 인류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의식이 있는 존재로 서서 행동 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심판받게 되리라는 것을 말한다. 이 심판에는 불신자는 물론 신자도 대상이 된다. 시편50편4-6절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까지도 심판의 대상이 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