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 ‘연탄 한 장’중에서
이 시는 안도현 시인의 시 ‘연탄 한 장’의 뒷부분이다. 우리 주위에는 흔하게 만나고 금방 스쳐지나가 버리는 많은 것들이 있다. 차창가로 스쳐지나가면서 늘 보는 것들이지만 관심을 갖고 눈여겨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시인이나 예술가는 보통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고 흘려보내는 것들 속에서 삶의 남다른 의미를 발견해 내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시인의 눈을 ‘얼드리치’라는 평론가는 ‘간파’라는 말로, 단순히 사물을 시각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찰’이란 개념과 구분한다. 눈으로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삶과의 관련, 삶의 깊은 의미를 캐낼 수 있는 눈으로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일단 제 몸에 불이 붙었다 하면 /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신은 타고 남은 뒤에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그 누구에게도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반성한다. 남김없이 자신을 태우는 일의 두려움, 일의 끝에 맞닥뜨려야 하는 허무감, 이런 것들에 지레 겁을 내고 아무 실천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이켜 보는 것이다.
만약 낙화가 무서워 꽃 피우기를 두려워하는 꽃이 있다면 우리는 무어라 했을까. 인생의 끝은 언제나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으니 목숨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단정해버린다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무가치하게 느껴질까.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타고 남은 재처럼 쓸쓸한 결말로 내게 온다 할지라도 의미 있다고 하는 일을 위해 몸을 활활 태우는 일, ‘나 아닌 그 누구에게 /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일 그 자체로서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허무한 한 덩이 재마저 산산이 으깨어 미끄러운 세상에 마음 놓고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에 바치는 삶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은 또다른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단 한 번 누구에게라도 뜨거운 사람이지 못했던 사람은 연탄재 하나라도 함부로 차지 말라는 이 말은 연탄재 하나보다 더 뜨거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수사적 반어로 읽힌다. 시집을 덮으며 나도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묻는다.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