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산행
어수선한 연말이 지나고 또 바쁘게 새해가 왔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연말 연시는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보다는 대개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연말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한 각종 송년 모임으로 분주하고 새해 첫날부터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인사를 하기 위해 바쁘다. 신정 연휴를 보내면서 조용히 새로운 다짐을 해 보거나 새해 계획을 세울 시간도 없이 쫓기듯 한 해를 시작한다.
연초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산행을 했다. 겨울 산길은 언제 찾아도 좋다. 도심 속에서 쫓기는 생활, 무겁고 분주한 생각의 실타래들을 털고 빈 마음으로 산을 대할 수 있어서 좋다. 겨울 골짝을 얼지 않고 흐르는 물 소리의 신선함이 좋고 참나무 마른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제대로 들려서 좋다. 다른 계절의 산행 때와는 다르게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욱 좋다. 걸음이 여유로워지고 따라서 마음도 더욱 여유가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마음 또한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몇 시간씩 걷다 보면 자연 발걸음도 무겁고 마음도 지치게 된다. 그럴 때면 올 한 해는 또 얼마나 힘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산뜻한 걸음,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을 해도 걷다 보면 지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도 원망과 짜증이 생기고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등에 진 짐도 무거워지고 이 짐을 벗어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 주저앉았는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래 사람의 수명은 서른 살이었다고 한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서른 살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나귀가 달려와 “하느님, 그렇게 오래 살면 저는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줄여 주십시오” 해서 당나귀의 수명을 십이 년 깎아 십팔 년이 되게 했단다.
그랬더니 개가 달려와 “저는 그렇게 오래 뛰어다닐 수가 없으니 저도 줄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해서 십팔 년을 줄여 십이 년이 되게 하였다. 이번에는 원숭이가 달려와 “저는 사람들을 웃기고 재롱이나 떨면서 사는데 늙어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깎아 주십시오” 하여 십 년으로 줄여 주었단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께 찾아와 “삼십 년은 너무 짧습니다” 하고 화를 내기에 당나귀와 개, 원숭이에게서 줄인 것을 모두 합쳐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은 팔십이 되었는데, 그 덕택에 사람은 사는 동안 당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고 개처럼 헐레벌떡 뛰어다녀야 하며 원숭이처럼 먹을 것을 던져 주는 사람 앞에서 재롱을 떨고 바보짓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올 한 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짐과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나날들과 밥벌이를 해야 할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차곡차곡 쌓이는 일의 성과 속에서 살아 있는 의미를 확인하며, 그것으로 생활의 양식을 벌어 간다면 우리 인생은 그렇게 헛된 노고로 이어지는 삶만은 아닐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독이고 여유를 갖자. 그리고 또 가자. 저 산 저 고개 내가 넘어야 할 곳을 잃지 않으면 될 것이다. 올 한 해도 앞으로 나의 인생도 그렇게 걸어가자 그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 늘 제일 힘들지만, 그 고개를 넘었을 때의 기쁨 또한 고통 때문에 더욱 커지는 것이니 그렇게 묵묵히 가자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고갯마루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산기슭마다 아름다운 눈으로 덮인 주흘산 봉우리가 보였다. 비경이었다. 저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못보고 앞만 보고 왔구나. 가다가 가끔씩 뒤돌아보면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올해도 또 앞만 보고 걷는 건 아닐는지 그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앞도 보고 뒤도 보며 여유 있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