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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역사서 서론- 열왕기상

해밀턴의 구약역사서 서론- 열왕기상

강성열 교수님이 번역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유명하다. 솔로몬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는 열왕기상 1장에서 11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바, 1-10장은 솔로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11장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을 지지하지 않은 아비아달과 요압 등의 세력을 제거한 다음에(1-2장), 기브온 산당(山堂)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다. 이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선물로 받은(3장) 솔로몬은 나라 전체의 행정 구역을 12지역으로 나누며(4장) 바로 이어 성전 건축에 들어간다(5-7장).

1-1. 임태수, 『구약성서와 민중』290-94: 신명기 사가는 기브온 산당 설화를 통하여 솔로몬의 왕위승계를 합법화시키고, 솔로몬 통치의 안정적인 모습(4장)을 소개하는 중에 왕실의 호화로운 식생활(22-23절)과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며(25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20절)고 봄으로써 솔로몬 통치 시대를 이스라엘이 열망한 메시야 시대의 상황과 동일한 것(미 4:4; 슥 3:10)으로 이상화시키기까지 한다.

1-1-1. 왕상 1-10장의 긍정적인 묘사는 신명기 사가가 어용사가여서 무조건 솔로몬을 미화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한때 찬란했던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암담한 민족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10장에도 솔로몬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많이 숨어 있다. 피의 숙청, 강제 노역(왕상 5:13-16), 건축 비용 조달을 위한 과중한 세금(왕상 4:8-19, 유다 지파는 제외), 사치와 향락(4:22-23; 11장) 등이 그러하다.

2. 성전 건축을 마무리한 다음에는 성전 낙성식(落成式)을 행하는 가운데 백성을 위한 축복 기도를 드린다(8장). 더 나아가서 솔로몬은 왕궁 건축을 비롯한 각종 건축 공사를 활발하게 벌였으며 군비(軍備)를 확장하는 한편, 육로(陸路)와 해로(海路)를 통한 교역 활동에도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9-10장).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러 온 스바 여왕도 사실은 물물 교역을 위해 그를 찾은 것이었다(10:10-13).

3. 그러나 솔로몬 역시 말년에 가서는 비뚤어진 정치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의 무분별한 정략(政略) 결혼이었다. 그는 외교 관계의 증진을 위해 주변 나라의 많은 여인들을 왕궁에 불러 들였으나 그 여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방 종교가 예루살렘에 물밀듯이 들어옴으로써 예루살렘은 마치 이방 종교의 전시장처럼 되어 버렸다(11:1-8). 또한 솔로몬은 건축 공사를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함으로써(5:13-18; 11:28) 상당한 반발에 부닥치게 되었다.

4. 그 결과 국민들의 여론이 솔로몬을 등지게 되었고 이를 틈타 하닷, 르손, 여로보암 등이 연쇄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11:14-26). 더 나아가서 그가 죽은 다음에는 북쪽 지파 사람들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을 세겜으로 불러들여 솔로몬이 그들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주지 않으면 왕으로 섬길 수 없음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이에 불응함으로써 솔로몬까지 이어졌던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은 마침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12장). 이리하여 이른바 분열왕국 시대가 이어지게 된다.

4-1. 이나미 『요나와 피노키오』116; 솔로몬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서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얻은 아들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출생 배경이나 다윗의 다양한 여성 편력으로 인하여 사랑과 관련된 도덕과 윤리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을 수도 있다.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거느린 것이 그 점을 뒷받침할 것이다. 그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와 지혜로운 어머니의 간통 사건, 그리고 그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로서의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아 정체성을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형제들 사이의 권력 투쟁 모습을 보면서 자라온 그로서는 평탄치 못한 가정 생활로 인해 지고지순한 사랑에 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4-2. 이나미 117; 솔로몬이 늙어 성생활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동첩을 들일만큼 사랑에 굶주린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 아니었을까? 119;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피비린내 나는 궁정의 권력 싸움에서 살아나 마침내 120; 기적적으로 권좌에 오른 그로서는 지혜가 없이는 앞으로의 통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121; 만약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대신에 그의 내면을 행복하게 할 진실한 사랑과 신심을 청했다면 어떠했을까? 그가 천 명의 아내를 얻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그가 그만큼 많은 방황을 했으며 그 누구에게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성생활의 타락과 신앙에 대한 회의로 인한 우상 숭배는 그가 지닌 콤플렉스를 부정적인 쪽으로 분출시킨 것이 아닐까?

5. 분열왕국 시대에 대한 설명은 열왕기상 12장에서 열왕기하까지 계속되는 바,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두 19명의 왕들이 통치하며, 남왕국 유다는 모두 20명의 왕들이 통치한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여덟 차례씩이나 쿠데타(政變)가 일어날 정도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19명의 왕들 가운데 쿠데타를 일으킨 왕은 바아사, 시므리, 오므리, 예후, 살룸, 므나헴, 베가, 호세아 등이었다. 그래도 이들 중에서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긴 오므리나 아합의 씨를 진멸하고서 왕위에 오른 예후는 각각 4대, 5대에 이르기까지 왕조를 지속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안정된 통치를 이룰 수 있었다.

6. 그러나 북왕국의 19왕들 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백성을 잘 다스린 왕은 한 명도 없었다. 특히 악명이 높았던 오므리 왕조의 아합(869-850)은 이세벨과의 정략 결혼을 계기로 하여 바알 종교를 거의 국교화하다시피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의 시대에 엘리야라는 유명한 예언자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엘리야는 아합의 철권 통치 하에서 바알 종교에 맞서 야웨 신앙을 수호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으며, 그의 뒤를 이어 예언자가 된 엘리사는 여러 기적들을 통해서 엘리야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7. 열왕기상은 크게 보아 솔로몬의 통치와 그가 죽은 후의 분열왕국 시대 초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르호보암으로 시작된 남왕국 유다의 경우 열왕기상은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의 통치 시기까지를 다루며, 여로보암 1세로부터 시작된 북왕국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여덟 번째 왕인 아하시야의 통치 시기까지를 다룬다. 아하시야의 통치는 열왕기하에서도 이어짐으로써 그의 통치 시기는 열왕기에서 나누어지고 있다. 그리고 북왕국의 아합 시대에는 예언자인 엘리야의 활동이 길게 소개되어 있다.

8. O. Kaiser, 『구약성서 개론』177-78: 열왕기는 두 왕국의 통치 연대를 병렬시켜 소개하는 바, 이러한 동시연대법은 왕상 15:1의 아비얌으로부터 시작해서 왕하 18:1의 히스기야에게서 끝난다. 그리고 유다 왕들의 경우에만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와 왕의 어머니 이름이 소개된다. 왕의 일반적인 경건에 관한 설명은 어느 왕에게서나 똑같이 나온다. 그러나 여로보암 1세와 예후의 경우에는 서론이 빠져 있는데, 이는 두 왕에게 그들이 왕이 된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화가 있기 때문이다. 유다의 왕위 찬탈자인 아달랴에게는 왕의 동시연대법이나 나이 서술, 어머니 소개, 왕의 경건에 대한 설명 등이 빠져 있다. 신명기 사가는 아달랴를 유다 왕의 명단에서 빼고자 한 것 같다.

8-1. 열왕기는 (1) ‘솔로몬의 행장(行狀)’(왕상 11:41/ the Book of the Acts of Solomon); (2)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歷代志略, 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el; 왕상 14:19의 여로보암 1세에서 처음 언급되고 왕하 15:26의 마지막 왕 호세아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3) ‘유다 왕 역대지략’(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Judah, 왕상 14:29의 르호보암에서 처음 언급되고 왕하 24:5의 여호야김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등의 세 가지 자료들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9. 열왕기상의 내용은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세분될 수 있다.

1-11장솔로몬의 통치(961-922)

12:1-14:20열 지파의 반역 및 북왕국의 여로보암 1세(922-901)

14:21-31남왕국의 르호보암(922-915)

15:1-24남왕국의 아비얌(915-913)과 아사(913-873)

15:25-32북왕국의 나답(901-900)

15:33-16:7북왕국의 바아사(900-877): 쿠데타로 집권

16:8-14북왕국의 엘라(877-876)

16:15-22북왕국의 시므리(876, 7일): 쿠데타로 집권

16:23-28북왕국의 오므리(876-869): 쿠데타로 집권

16:29-22:40북왕국의 아합(869-850): 엘리야의 활동

22:41-50남왕국의 여호사밧(873-849)

22:51-53북왕국의 아하시야(850-849)

10. 신명기 역사가는 종교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남북 왕국의 왕들을 평가한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암 1세의 행위(왕상 12:28-33)를 기준으로 사용하였다. 모두 15명이 동일한 평가를 받는다:

왕상 15:26 [나답/2]왕상 15:30 [나답]

왕상 15:34 [바아사/3, 쿠데타]왕상 16:19 [시므리/5, 쿠데타]

왕상 16:25-26 [오므리/6, 쿠데타]왕상 16:30-31 [아합/7]

왕상 22:52-53 [아하시아/8]왕하 3:3[여호람/9]

왕하 10:29[예후/10, 쿠데타]왕하 10:31[예후]

왕하 13:2[여호아하스/11]왕하 13:6[여호아하스]

왕하 13:11[요아스/12]왕하 14:24[여로보암 2세/13]

왕하 15:9[스가랴/14]왕하 15:18[므나헴/16]

왕하 15:24[브가히야/17]왕하 15:28[베가/18])

10-1. 북왕국의 18 왕들(여로보암 1세는 제외) 중에서 엘라(4), 살룸(15), 호세아(19) 등은 이러한 판단이 적용되지 않으나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엘라와 살룸은 제각기 시므리와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평가를 받을만한 여유가 없다. 반면에 호세아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는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왕하 17:2). 신명기 역사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역시 종교적인 탈선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왕하 17:7-23). 북왕국의 왕들이 한결같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간 것은 왕조 세습이 드문 북왕국에서는 왕권을 획득했을 경우 장로들의 인준을 받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종교 정책을 답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킨 예후 역시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간다.

10-2. 남왕국 유다의 경우에는 20명의 왕들 중에서 여덟 명의 왕만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그 기준은 그들이 야웨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왕상 15:11-15; 22:43; 왕하 12:2-3; 14:3-4; 15:3-4, 34-35). 그러나 그 여덟 명 중에서도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야웨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거쳐 산당을 제거한 까닭에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았다(왕하 18:3-4; 23:13-15). 산당 제사는 솔로몬 성전의 건축 이전에는 정당화되었으나 성전 건축 이후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10-2-1. 삼상 9:10-14=“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 있는 성으로 가니라. 그들이 성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섰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에 들어오셨나이다. 당신들이 성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라.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금시로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10-2-2. 삼상 9:18-19, 25=“사울이 성문 가운데 사무엘에게 나아가 가로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컨대 내게 가르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선견자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날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삼상 10:5, 13=“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10-2-3. 솔로몬 시대에도 백성들은 성전 건축 이전 시기에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솔로몬 자신도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다: 왕상 3:2-4=“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